가. 하와이지역
1903년 1월 13일 한인들은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 와일루아(Waialua) 사탕농장에 배속된 것을 시작으로 개간·김매기·관개사업·사탕수수베기 등 하루 12시간씩 가혹한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하와이 사탕농장의 과다한 노동력 착취와 반노예적인 노동조건으로 말미암아 1910년까지 45명의 한인이 사망하였으며, 504명은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갔다.456) 그러나 하와이에 재류할 수밖에 없던 한인들은 가혹한 사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 농장 단위별로 자치회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1903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洪承夏·尹炳求·李交倓·林蚩正·安定洙·林炯住·朴允燮·文鴻錫 등이 ‘同族團結·民智啓發·國政刷新’을 목적으로 최초의 정치단체인 新民會를 창립하자, 이후 한인들은 각 지방별로 洞會를 조직하여 친목 유지와 同族相愛에 주력하였다.457)
1904년 2월 일제는 러일전쟁 도발 직후<韓日議定書>체결을 강제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4월 8일<한국보호권 확립의 건>을 통해 한국의 외교를 직접 담당하여 한국이 외국과 조약 체결을 못하도록 하고, 해외 한인을 일본의 감독·통제하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일제가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 지배권을 승인·보장받음과 동시에 해외 한인들마저 일제 臣民으로 편입시켜 사전에 항일운동을 봉쇄하려는 정책이었다.458) 이러한 일제의 해외 한인 통치의도를 간파한 하와이 한인들은 한인사회 보호를 위해 1905년 1월 대한제국정부에 영사관 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일제는 대한제국정부에 압력을 가해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위임하는 등 하와이 한인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의도를 표출시켰다. 이에 분노한 한인들은 일본 영사의 감독을 거부하면서 5월 3일 하와이 오하우(Ohau)지방 에와(Ewa)농장에서 尹炳求·鄭元命·金聲權·姜永韶·金圭燮·이만춘 등이 에와친목회를 조직하고 日貨排斥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8월에는 하와이 한인들이 總代 李東鎬를 국내로 파견하여 外部에 영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을사조약으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갔다.459)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주재한 주미 한국공사관을 철폐하고 1906년 2월 주미 대리공사 金潤晶을 소환하였다.460) 또한 일제는 대한제국정부에 압력을 가해 “해외 한인은 어느 곳에 있던지 일본 영사의 보호를 받으라”고 명함으로써 사실상 해외 한인에 대한 일제의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이에 에와친목회는 미 본토의 共立協會와 더불어 ‘在美韓人共同大會’를 개최하고 한국정부에<排日決議文>을 발송하는 등 항일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때부터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을 표방한 단체가 연이어 조직되었다. 1906년 3월 10일 하와이 오하우지방 와이파후(Waipahu)농장에서 安元奎·전도원·정상교 등이 患難相救·일화배척을 목적으로 와이파후공동회를 조직하였으며, 5월 10일에는 하와이 올라(Olaa) 3마일(mile) 농장에서 申判錫·공덕화 등이 배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血成團을 조직하였고, 한달 뒤인 6월 4일에는 카와이(Kawaii) 막가윌리농장에서 송건·洪宗杓(후일 洪焉으로 개명)·高錫柱·李觀黙·이형기 등이 실력양성과 교육장려를 표방하며 自强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12월 2일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閔燦鎬·李來洙·林正洙·任準鎬 등이 共進會를 조직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의 항일단체 조직은 1907년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907년 2월 3일 하와이 하비농장에서 정병섭·편성원 등이 동족상애와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老少同盟會를 조직하였으며, 이틀 뒤인 5일에는 마우이(Maui) 카일루아(Kailua)농장에서 김재규 등이 항일운동과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義成會를 결성하였다.461)
1907년 7월 일제가 光武皇帝(高宗)를 강제 퇴위시키고 丁未條約을 강제 체결한 뒤<신문지법>·<보안법>·<軍隊解散令>등을 포고하자, 국내에서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내소식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다시 격동시켰다. 1907년 7월 17일 마우이 가히기아농장에서 김건호 등이 대동단결·일화배척을 표방하며 國民團合會를 결성하였으며, 같은 해 7월 18일에는 하와이 파하윌로농장에서 金成玉 등이 무예장려·항일운동을 주창하면서 新幹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7월 20일 하와이 힐로(Hilo)지방에서 朴勝烈 등이 무예장려·실업장려·일화배척을 목적으로 實志會를 조직하였고, 22일에는 채극여·김봉기 등이 國民同盟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8월 5일 마우이 하마구아 복구농장에서는 전백선·서성년 등이 인재양성과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復興會를 조직하였고, 9월 3일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金翊成·朴相夏·趙炳堯·최병현 등 성공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부흥운동과 교육장려를 목적으로 전흥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외에도 하와이의 코나(Kona)·가파아(Kapaa)·하갈라우·호노카·파야·나와이·와일루아 등 7개 지방 동회에서도 항일운동·일화배척을 결의하면서 연이어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462)
이처럼 하와이에서는 1907년 9월까지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14개의 정치운동단체와 12개의 동회가 조직되어 한인사회 민족운동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인구 4,000여 명 중 활동회원이 약 800여 명인데 비해 20여 개 이상의 단체가 난립하는 것은 국권회복운동 수행에 많은 걸림돌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공진회·에와친목회 등 한인단체들은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을 후원하고, 재류동포의 안녕을 보장하며 교육사업을 증진”하기 위해 분립된 단체를 통합하여 통일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다.463)
1907년 9월 2일 각 지방 24개 단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5일간의 회의 끝에 4개조의 합동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하와이 한인의 통일적 정치운동기관인 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였다. 한인합성협회는 10월 22일부터 기관지≪韓人合成新報≫를 발행하고, 47개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여 1,051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등 하와이 한인사회의 구심체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464)
456) | 金元容,≪在美韓人五十年史≫(캘리포니아 리들리, 1959), 8쪽에는 1910년 大韓人國民會에서 조사한 인구통계를 근거로 하와이 총이민자 7,226명 중 귀국자는 983명, 미 본토 이주자는 2,011명, 사망자는 45명으로 하와이에 재류한 한인은 4,187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盧載淵,≪在美韓人史略≫(로스앤젤레스, 1963:국가보훈처,≪獨立運動史資料集≫8집에 수록), 458쪽에 보면 이 중 479인은 하와이 도착시 부적격자로 판정되어 다시 한국으로 환송되었다 한다. 따라서 하와이 이주 후 거주자는 총 6,747명이며, 귀국한 사람은 504명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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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 金度勳,<大韓帝國期 韓人의 渡美經緯와 在美韓人團體의 形成過程>(≪北岳論叢≫12, 국민대, 1994), 14∼16쪽. |
458) | 金度勳,<러일전쟁전후 일제의 조선침략과정>(≪殉國≫, 1993년 1월호), 110∼112쪽. |
459) | 김도훈, 앞의 글(1999), 92∼93쪽. |
460) | 盧載淵, 앞의 책, 476쪽. ≪共立新報≫, 1906년 2월 13일,<公使徹歸>. |
461) | 金元容, 앞의 책, 91∼92·262·310쪽. ≪共立新報≫, 1906년 12월 7일,<布哇共進會>·1907년 7월 12일, 雜報<共進會報 新刊>. |
462) | ≪共立新報≫, 1907년 8월 9일, 雜報<국민동맹회>·9월 20일, 잡보<전흥협회 취지서>. 金元容, 위의 책, 54·92∼94·261∼262쪽. |
463) | ≪공립신보≫, 1908년 2월 12일, 잡보<하와이발달>. |
464) | ≪공립신보≫, 1907년 9월 6일, 잡보<하와이소문>·20일, 잡보<깃븐소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