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미 본토 지역
1903년 당시 미국 본토 한인들은 소수의 蔘商을 제외하고는 캘리포니아(California)지역에서 농장·철도역장·광산·어장에 종사하거나 음식점 助役·가정집 고용살이·세탁소·노동·행상 등으로 힘든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친목 도모와 경제적 도움을 줄 단체 결성이었다. 그리하여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桑港〕에서 安昌浩를 비롯한 李大爲·朴永淳·金成武·張景 등 9인이 미주한인단체의 효시인 親睦會를 조직하였다. 친목회는 1904년경부터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건너온 한인에게 취업알선을 통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등 노동주선소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때 국내에서는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자, 미주 한인들은 한인의 보호와 일제에 대항할 강력한 정치단체 출현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친목회는 1905년 4월 5일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기관인 共立協會로 전환·창립되었으며, 12월 9일에는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Pasadena)에서 張景·金美理士·金愚濟·李秉瑚·方四兼 등이 大同敎育會를 창립하였다. 그후 1905년 11월 13일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된 헐버트(Homer B. Hulbert)가 공립협회를 방문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서두르는 일제의 동태를 전달하였다. 이에 공립협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共立館’과 지회설립에 착수하여 1907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해안 일대에 5개 지회를 조직하는 등 정치단체로서 위상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2월 대한제국정부가 ‘해외 한인의 일본 영사 보호’를 선언하자, 공립협회에서는 하와이 에와친목회와 더불어 ‘재미한인공동대회’를 개최하고 한국정부에<배일결의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미주 한인에 대한 지배의도는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大震災 당시, 공립관이 全燒한 일을 계기로 다시 표출되었다. 즉 일제는 대한제국정부에서 공립협회로 보내는 의연금을 주미 일본영사로 하여금 分給하도록 함으로써 미주 한인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립협회는 5월 11일 총회 평의회를 개최하여<通告文>을 발표하고 일본영사의 간섭행위를 통박하는 한편, 일본영사를 방문·항의하여 한인사회에 대한 간섭행위 중지를 확약받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 사건 직후 공립협회는 미국내 한인의 대표기관이자 자치기관으로서 자리를 굳혔다.465)
한편 1907년 1월 시대적 조류에 따라 대동교육회도 국권회복을 표방하며 정치운동기관인 大同保國會로 전환하였다. 대동보국회는 1907년 10월 3일부터≪大同公報≫를 발행하고 5개 지회를 설립하는 등 공립협회와 더불어 미주 한인사회의 구심체로 활동하였다.466)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구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한국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독립전쟁’ 수행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해외 한인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7월 25일 뉴욕(New York)에서 安定洙·申聲求·徐弼淳·李源益·車斗煥·安圭善 등 관비유학생과 구한국 관리출신들이 항일운동·동족상애를 목적으로 共濟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 9월, 일본영사가 뉴욕시내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인의 인명을 조사해 간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공제회는 9월 13일 일본영사의 해외 한인에 대한 감독권 행사 거부를 결의하였다.467) 또한 11월 24일 시애틀(Seattle)에서 이정실·김익제·박용하·장한조·김경식·오창덕·강봉희 등이 항일운동·동족상애를 표방하면서 同盟新興會를 결성하였다.468)
이와 같이 미 본토에서는 1907년 당시 4개 단체가 있었으나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 그후 1909년 2월 미주 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國民會를 창립한 데 이어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마저 국민회로 통합되자, 미주 한인사회는 통일적 정치운동기관인 大韓人國民會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