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창립 직후부터 국민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한편,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 초부터 본국으로부터 연이어 ‘합병’ 소식이 들려오자, 국민회는 대한제국정부가 “난신패적의 도당붕배”이므로, “우리 인민이 불가불 공론을 제창하며 위엄을 가다듬어 저 난신패적의 처치함을 실행하여 우리 국가와 민족을 보호”할 것과 “우리 인민의 권리를 주장하며 의무를 진력하여 그 처리할 수단을 다할 날이 오늘”이라고 선언하였다.475) 즉, 국민회는 대한제국정부를 부인하며 국가와 민족의 수호를 위해 근대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1909년 2월 19일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는 共同會를 개최하고 李完用과 宋秉畯에게 전보를 보내 경고하는 한편, 24일에는 日皇에게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평화를 위해 ‘합병’계획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476)
이와 같이 조국의 국망이 목전에 다가오자, 미주한인사회는 국민회 창립 직후인 1909년 2월부터 독립전쟁론에 바탕한 군인양성운동 여론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477) 이에 따라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1909년 6월부터 독립군 사관학교가 설립되는 등 ‘崇武主義’가 급속히 확산되어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군인양성운동을 전개한 것이 朴容萬(1881∼1928)이 네브라스카주(Nebraska)에 설립한 韓人少年兵學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