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한인소년병학교
박용만은 1905년 2월 도미 직후부터 독립군 양성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1월, 콜로라도(Colorado)주 덴버(Denver)에서 愛國同志代表會를 소집할 목적으로 미주·하와이·러시아 등지의 해외한인단체에<소집취지서>를 발송하였다. 이와 함께 동년 5월에는 朴處厚·林東植·鄭翰景 등과 더불어 韓人軍事學校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애국동지대표회에서 안건에 부치기로 하였다. 이는 박용만이 해외 한인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후 독립전쟁을 전개, 국권을 회복하려는 구상이었다.
1908년 7월, 박용만은 露領 대표 李相卨·이승만, 大同保國會의 金容德·李明燮, 하와이 대표 金聲權, 뉴욕 대표 尹炳求·金憲植 등이 참가한 애국동지대표회에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 박용만은 박처후·임동식 등과 더불어 생도들이 기숙·훈련할 수 있는 군사학교 설립부지를 네브라스카주 커니(Kearney)시 한 농장에 마련하는 한편, 曺鎭贊을 농장경영자로 초빙하였다. 또한 미국정부와 네브라스카주정부의 인가를 얻어 훈련시 사용할 軍器로 미국에서 사용하던 군용총을 구입하고, 구 한국군 출신 김장호를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09년 6월 초순,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가 창립되었다.
그 후 1910년 박용만이 헤이스팅스대학측과 교섭하여 학교 건물 한 동과 田莊을 임대받음에 따라 1910년 4월 한인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한인소년병학교가 헤이스팅스(Hastings)로 이전해 오자, 링컨(Lincoln)·커니지방 등에서 거주하던 柳一韓·鄭良弼(鄭淳萬의 아들) 등 한인 유학생들이 속속 자원 입학하였다. 한편 박용만은 학교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 전권을 김장호에게 맡기고 각지를 순회하였다. 그리하여 박용만은 캘리포니아에서 600달러를 모금하고 조진찬·鄭永基·김유성 등으로부터 특연금과 총 15정을 기부받는 한편, 네브라스카주에 韓人公會를 설립하고 지역내 모든 한인들을 가입시켜 1년에 3달러씩 人頭稅를 부과하여 한인소년병학교 재정에 충당하였다.
이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 여름방학을 이용, 소년병학교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 체제로 운영되었다. 즉 한인소년병학교는 1년 중 하계 3개월을 제외한 9개월 동안은 학생들이 각자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6월부터 8월까지 여름방학 3개월 동안 헤스팅스학교에 등록·수학하도록 하였으며, 수학과정은 3년이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3년 후인 1911년 8월 제1회 졸업식에서 13명의 사관생도를 배출하기 시작하여 1914년까지 약 1백여 명의 생도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1912년 11월 학장 박용만이 大韓人國民會 하와이地方總會의 초청으로≪新韓國≫주필로 초빙되어 감에 따라 박처후가 교장이 되어 2년간 유지하였으나 인원모집 곤란 등으로 6년만에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는 국어(문법·작문·문학), 영어(문법·작문·문학), 한문(중국어 회화·한문 작문), 일어(문법·회화), 수학(산수·대수·기하), 역사(한국사·미국사), 지리(만국지리·한국지리·군사지리), 이과(식물학·동물학·물리학·화학·화학측량법), 성서, 병학(도수조련·집총조련·小中大편제·야외조련·사격연습·보병조련·군대내무서·육군예식·군인위생·군법통용·명장전법)으로 구성되었다. 교사진은 홍승국·김홍기·박처후·양긍묵·신형호·박장순·박원경·백일규·이종철·정희원·이용규·이명섭·이걸 등이었다. 또한 군사훈련은 미국의 근대식 군사훈련을 모방하였고, 교과과정은 웨스트포인트를 본따 만들었다. 미국내 여러 군사학교를 수료한 군사교육 담당 이종철은 6년 동안 학생들을 철저히 훈련시켜, 미국인들조차 한국의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일과는 오전에는 노동과 학습, 오후에는 군사훈련, 밤에는 문학활동과 학습을 하였다. 따라서 생도들은 인문과목은 물론 사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군사학과 야외실습 등 고된 군사교육을 이수하였다. 또한 생도들은 사격연습은 물론 노래·스포츠·연극 등으로 군인정신을 고취하고 아울러 대외선전에도 활용하였다. 이 한인소년병학교는 자치기관을 만들어 법에 의한 구속력을 가하고 屯田兵式으로 군인을 훈련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박용만의 구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해외 최초의 한인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는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하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한인소년병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 만주·노령 등지에서 직접 독립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미국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싸우다 전사하는 등 한·미 양국간에 공헌하였다. 특히 이 학교 출신인 鄭翰景·柳一韓·韓始浩·申衡浩·洪承國·金容成·金鉉九·白一圭 등은 이후 재미한인사회의 실질적인 중견 지도자로 활동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등 커다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한인소년병학교는 1910년대 미주 한인사회에 군인양성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478)
478) | 한인소년병학교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 참조할 것. 朴永錫,<韓人少年兵學校 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方善柱,<朴容萬評傳>(≪在美韓人의 獨立運動≫, 한림대, 1989). 尹炳奭,<1910年代 美洲地域에서의 祖國獨立運動>(≪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一潮閣, 1990). 金度勳,<1910년대 박용만의 정치사상>(≪한국민족학연구≫4, 단국대, 1999). 안형주,<박용만의 소년병학교>(≪한국민족학연구≫4, 단국대,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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