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멕시코의 숭무학교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이후, 가장 먼저 군인양성운동에 동참한 것은 멕시코 한인사회였다. 멕시코에 한인사회가 형성된 것은 1905년 3월 1,000여 명의 한인이 영국인 메이어스(John G. Meyers)와 大陸殖産會社를 경영하던 일본인 大正貫一의 기만에 속아 멕시코로 노예이민을 오면서부터였다. 멕시코 유카탄(Yucatan)주 메리다(Merida)지방에 도착한 한인들은 어저귀농장에 강제 배속되어 이후 4년간 가혹한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후 1909년 4월 15일, 계약기간 만기로 강제노동에서 해방된 멕시코 한인들 중 李根永·申光熙·趙秉夏 등은 미주의 國民會로 연락하여 멕시코 한인들의 구제와 생활지도를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국민회는 邦化重과 黃思溶을 특파하여 멕시코 각 지방을 순회하며 동포들의 사정을 조사케 하였다. 황사용과 방화중은 멕시코 도착 후, 멕시코 메리다지방 한인들의 요청으로 5월 9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하고, 구제사업을 전개하였다.
메리다지방회 설립 직후 회장으로 선임된 이근영은 1909년 8월부터 유카탄 반도의 띄치·작골·쏘실 등 세 곳에 경찰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일 한 두시간씩 병법체조를 교련하도록 하는 등 멕시코 한인사회에 숭무주의를 고취시켰다. 이에 따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는 동년 8월 19일에 을사조약 대치욕기념일 행사시 메리다 시내에서 군사행진을 펼쳐 유카탄총독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메리다지방회장 이근영은 11월 10일을 기해 메리다지방회 산하 각 경찰소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軍法體操를 행하여 무예체육을 보급하는 한편, 11월 15일 군사운동 실시를 발표하여 멕시코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군인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메리다지방회에서는 1909년 11월 17일 전체 회원이 운집한 가운데, ‘을사조약 파기선언’과 함께 도지휘관에 이근영, 조교에 양귀선·조병하·이수근을 선임하는 한편, 이튿날인 18일에는 이근영의 지휘 아래 2개 소대 110여 명이 군사훈련 실시와 시내행진을 통해 대한인의 기상을 드높였다. 이처럼 멕시코 한인사회에서 불기 시작한 군인양성운동은 1910년 2월 경 작둔지방에서 崇武學校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479) 숭무학교 설립 직후 교장으로 부임한 이근영은 구한국군 공병 하사로 있던 경험을 살려≪軍務要領≫을 저술·보급하였으며, 이 책은 숭무학교의 군사교본이 되었다.
이같이 숭무학교가 확장되던 즈음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메리다지방회 회원들은 가족을 따라 피난하거나 혹은 전쟁에 종군하는 등 사방으로 산재하는 바람에 1913년 폐교되고 말았다.480)
479) | ≪新韓民報≫, 1910년 3월 2일, 잡보<숭무개교>. |
---|---|
480) | ≪新韓民報≫, 1909년 9월 8일, 논설<在墨同胞之崇武主義>·11월 3월, 잡보<멕시코통신 國辱紀念>·11월 10일,<국민회보>·12월 8일,<멕시코통신 재묵동포의 와신상담>·12월 15일,<멕시코통신 재묵동포의 와신상담>및 1910년 3월 2일, 잡보<숭무개교>·3월 23일, 잡보<한인의 명예>·3월 30일,<묵서가동포의 숭무주의>·6월 1일, 잡보<숭무학교>및<멕시코동포의 열성>·7월 20일, 新潮<步兵要操抄選>. 金元容, 앞의 책, 345쪽. 尹炳奭, 앞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