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국민회의 군인양성운동
1909년 6월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와 멕시코 崇武學校의 군인양성운동이 전개되는 것과 함께 미주에서도 1909년 6월부터 군인양성운동의 기치가 내걸렸다. 이미 중학교에서 무관학교 과정을 교수하고 있던 국민회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지방회 독립군양성을 위한 학생양성소 설립이 그 시발점이었다.481) 그러나 이것은 한 지방회에서 조직한 운동이었으며, 국민회 차원의 군인양성운동이 본격적으로 표명된 것은 1909년 8월부터였다. 즉 국민회 주필 최정익은≪新韓民報≫, 1909년 8월 4일자에<大呼國民>이란 寄書를 통해 조속히 군인양성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였다.482) 그러나 당시 국민회는 해삼위지역에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탓에 미주지역내 군인양성운동은 1910년 5월 이후에야 본격화되었다. 1910년 5월 국민회 산하 클레몬트(Clarement)학생양성소에서 매주 3일씩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6월에는 롬폭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이후 미주 각지에서 군사훈련 풍조가 일기 시작하였다.483) 이러한 미주 한인사회의 군인양성운동은 소위 합방반대운동이 전개되면서부터 더욱 가열되었다.
1910년 7월 일제의 ‘합방’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에서는 각기 새크라멘토(Sacramento)와 호놀룰루에 지방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공동대회를 개최한 후 愛國同盟團과 大同共進團을 조직하고 9개조와 6개조의 항일운동방침을 결정하였다.
북미지방총회에서 결성한 애국동맹단은 7월 4일 결의안에서 ①일본이 국제공약을 무시하고 한국을 강탈하는 사실을 명문하여, 한국과<相互條約>을 체결한 중국·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태리·오스트리아 등 9개국 정부에 조약상 의무를 요청하기로 함, ②한국황제에게 일본의 무리한 ‘합방’ 요구를 끝까지 거절할 것을 상소하고 일본황제에게 우리의 합방 반대의사를 통지함, ③국내동포들의 비참한 실정과 倭賊의 不義行動을 탐지하기 위해 국내에 연락기관을 설치함, ④국내 실정을 탐지하는 대로 선전문을 작성하여 유럽 각지의 유력한 언론기관에 발표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노력함, ⑤국제공법과 선전문 작성에 기능있는 법률사를 고빙하여 외교서류와 선전문 작성을 위탁하되, 외교서류와 선전문은 대한인국민회의 명의로 발행함, ⑥각 도시에 사람들이 많이 群集하는 節日을 이용하여 선전대회를 열고 때때로 대내 선전문을 발행하여 동포의 애국정신을 고취함, ⑦먼저 외교선전과 군사인재 양성사업에 착수함, ⑧애국동맹단 사업경비는 일반동포의 特捐으로 충당하며, 임원은 민중 公選으로 선출하여 사무를 掌理케 할 것을 천명하였다. 특히 국내에 비밀통신기관을 설치하여 애국동맹단원을 모집할 것을 주요과제로 삼았다. 이에 따라 북미지방총회에서는 외교를 포함한 군인양성운동을 민족운동방략의 하나로 적극 채택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대동공진단은 6개조의 결의안을 통해 ①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고, 왜적이 강압적 수단으로 만든 한일합방을 절대 반대하기로 결의함, ②한일합방 반대운동에 관한 모든 정책을 북미지방총회 결의안에 위반됨이 없게 행동일치를 도모함, ③한국황제와 일본황제에게 통지하는 서류는 이미 북미지방총회가 작성한 서류에 연서하여 우리의 태도와 책임을 같이하기로 함, ④외교와 선전사업은 대한인국민회가 擔責하고, 군인양성사업은 대동공진단에 일임하기로 함, ⑤각 지방에 양성소를 설립하고, 청년 동포로 하여금 의무적 兵式訓練을 받게 함, ⑥일반 운동의 경비는 동포의 愛國特捐으로 충당하고, 대동공진단 임원은 민중공선으로 선택하기로 하였다.
이 결의들에 의해 애국동맹단은 단장 崔正益, 외교원 尹炳求, 서기 李元植, 번역원 李大爲, 掌財 許承元, 회계 曺成學 등을 선출하였고, 대동공진단은 단장에 鄭元明, 재무에 安元奎, 서기에 李來洙, 외교원에 閔燦鎬를 선임하였다.
7월 6일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은 연서로 한국황제 앞으로 전보를 보내 ‘合邦’ 거절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 외무성을 통해 일본황제와 ‘駐韓統監’ 테라우치에게도 전보를 보내 ‘합방’ 취소와 선전포고를 하였다. 또한 애국동맹단은 통고문을 통해 세계 각국에 일제의 무력적 한국강점을 비판하는 외교선전에 주력하는 동시에, 遠東地域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할 사관생도양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은<武藝獎勵文>을 발표하여 미주 한인의 무예정신을 고취하는 한편,≪體操要旨≫를 출판·分給하여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5월 이미 대한인국민회 산하 클레몬트학생양성소에 군사훈련반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전개한 것을 필두로 동년 6월에는 롬폭에 義勇訓練隊, 11월에는 캔자스(Kansas)에 少年兵學院, 12월에는 와이오밍(Wyming) 슈페리오(Superior)에 靑年兵學院이 조직되어 매일 저녁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인양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하와이의 대동공진단은 하와이 각 지역에 軍人養成所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군인양성소 설립 후 석 달 후인 1910년 11월 대동공진단이 군인양성소를 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로 이관하자, 하와이지방총회는 練武部를 조직하여 독립군 양성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11월부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에서는 하와이 각 지역에 다수의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과 한인청년들로 하여금 매일 저녁에 목총을 메고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때 군사훈련에 참가한 한인들은 약 200여 명에 달하였다.484) 이후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의 군사훈련은 박용만의 초빙으로 전환기를 맞이하며 본격적인 군사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481) | ≪新韓民報≫, 1909년 6월 23일, 잡보<쏠렉에 학생양성소 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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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 ≪新韓民報≫, 1909년 7월 28일, 잡보<무기배양>·8월 4일, 기서<大呼國民>에 大視生(崔正益)은 “대전쟁 대분투를 시작하여 국민의 권리를 찾고 의무도 다 할 때에 만일 무예가 서투르면 암만 의식이 풍족하고 학식이 비상할 지라도 강한 적국의 대포 아래에 실패를 당할 터이니 불가불 군무는 연습하여야 되겠소”라고 하여 군인양성운동을 적극 표명하고 있다. |
483) | ≪新韓民報≫, 1910년 5월 18일, 논설<병법연습의 풍조>·잡보<조련을 힘씀>및 6월 29일, 잡보<롬폭에 독립군>.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군인양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네브라스카 한인소년병학교, 멕시코 숭무학교, 하와이 마우이섬 기릭구지방에≪체조제요≫란 책을 발송하는 등 군인양성운동을 지지하였다(≪新韓民報≫, 1910년 5월 25일, 회보<북미총회보>). |
484) | ≪新韓民報≫, 1910년 7월 7일, 호외<謹告我愛國同志諸君>·<決議文>·<合邦反對會議事錄>·<委員會議事錄>;7월 13일, 논설<救國策在外交軍事>;11월 2일, 잡보<서페리오연무회>. 金元容, 앞의 책, 339∼34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