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1운동의 전개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1919년 1월 20일 權東鎭·吳世昌·崔麟은 천도교 교주 孫秉熙의 사저인 常春園으로 찾아가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오래 전부터 그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손병희는 그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허락하였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추진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다음의 세 가지 독립운동의 원칙이 결정되었다.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 셋째, 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
그 밖에 구체적인 사항은 권동진·오세창·최린에게 위임되었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여 2월 초순부터 민족대연합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최린이 중심이 된 천도교측은 2월 상순 경에 최남선·송진우·현상윤 등과 재동 자택에서 극비리에 수차례 회합을 갖고 운동계획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중의 신망을 받는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였다.614) 그리하여 대한제국시대 구관료계의 尹用求·韓圭卨·朴泳孝·尹致昊 등과 접촉하여 그들을 민족대표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유보 또는 거절의 반응을 보여 크게 실망하였다. 구관 명사들을 접촉했던 것은 당시 종교계 대표들의 명망과 위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만 하지 못했던 현실에서 나온 고려였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들이 너무 약체여서 대중화를 기대하기에 어렵다고 생각하였다.615)
최린은 “독립운동의 신성한 제전에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는 말로 자신들이 대표로서 나서기로 하였다. 며칠 뒤 최남선이 최린을 방문하여 기독교측에서도 무슨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최남선은 金道泰를 통하여 정주의 李昇薰에게 상경해 주도록 연락을 취했다. 이승훈은 2월 11일 서울로 올라왔다. 최린은 일경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송진우로 하여금 이승훈을 만나 그간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게 하고, 기독교에서도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승훈은 이미 상해로부터 선우혁의 방문을 받고, 관서지방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차에,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한다는 데 찬성하여 쾌히 승낙하였다.
2월 12일 평북 선천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장로교 목사 梁甸伯의 집에서 장로 李明龍, 목사 劉如大·金秉祚 등과 천도교측의 제의를 의논하고, 즉석에서 참여하기로 결정하여 상경채비를 차렸다. 이승훈은 2월 14일 평양으로 가서 장로교 목사 吉善宙, 감리교 목사 申洪植 등과 만나 서울과 선천에서의 결정을 설명하였다. 두 사람 역시 참여를 승낙하였다.
이승훈은 2월 17일 다시 상경하여 소격동 김승희의 집에서 박희도를 만나 서울 기독교계의 이런 소식을 듣고 2월 20일 수창동 229번지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교 목사 吳華英·鄭春洙, 북감리교 감리사 오기선·신홍식 등과 회합하고, 또한 남대문로 5가의 咸台永의 장로교 집에서 세브란스병원 사무원 이갑성, 평양기독서원 총무 安世桓, 장로교 조사 吳尙根, 장로교 목사 玄楯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대체로 이때까지의 기독교측 논의는 천도교와 단합을 포기하고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되, 독립운동의 방법은<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할 것이며, 연고에 따라 지역별로 분담하여 동지를 모을 것을 합의해 가고 있었다. 이튿날인 2월 21일 최남선은 이승훈이 은거하고 있던 집을 방문하여 일제 경찰의 주목 때문에 연락을 취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함께 최린의 집을 방문하여 기독교측과 천도교측간에 독립운동 추진상황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이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계획 추진을 밝히자 최린은 민족독립운동이 절대 통합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616) 이승훈은 이 문제를 기독교 동지들과 의논하여 오겠다고 하며, 기독교측에서 곤란을 받고 있는 자금문제를 위해 3천 원에서 5천 원 가량의 자금을 천도교측에서 융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최린은 그날 저녁 동대문 상춘원의 손병희 교주에게로 가서 이를 보고하고, 5천 원을 융통해 주도록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인 22일 천도교 금융관장 盧憲容이 5천 원을 최린에게 가져 왔고, 최린은 소격동의 이승훈 거처로 직접 전달하였다. 기독교측에서는 그 전날 최린과 이승훈의 회동 이후 남대문 세브란스 병원 내 이갑성의 집에서 이승훈·박희도·오기선·신흥식·함태영·오화영·현순, 수원 삼일여중학교 교사 김세환 등이 모여 의논 끝에 천도교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해 본 후에 합동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그 교섭을 이승훈과 함태영 두 사람에게 일임하였다.617) 기독교측에서 천도교측의 운동방법을 탐문해 보아야 한다고 한 것은 천도교측에서 만주로부터 무기를 들여와 폭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풍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2일 저녁 최린의 집에 온 이승훈과 함태영으로부터 기독교측의 의논결과를 전해 듣고, 또 천도교측의 무장투쟁 계획여부에 대해 질문하자, 최린은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해명하였다. 다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독립청원’이냐 ‘독립선언’이냐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측은 독립청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최린은 이번 독립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외적인 환경과 우리의 자주적 정신의 전통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청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에 의한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아니면, 민중을 총동원할 수 없고, 민족정신의 위대성을 발휘할 수 없음을 역설하자 두 사람도 이에 찬성을 표하고, 동지들과 의논한 후 회답하기로 하였다. 이날 3인의 회합은 3·1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모임이었다. 그날밤 기독교측의 두 대표는 돌아가 천도교측과 합동할 것과, 천도교측의 주장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이승훈·함태영 두 사람을 기독교측 대표로 선정하고, 이후의 천도교측과의 제반 교섭을 일임하였다. 2월 24일 이·함 두 사람은 다시 최린의 집에 와서 기독교 대표 자격으로 무조건 천도교측과 합동할 것을 밝혔다. 이로써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대가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자리에서 또 독립운동의 추진방법에 대해 세부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하고, 탑골공원에서<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②<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하여 서울에서는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며, 지방에는 이를 분송한다. ③<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분송할 때 서울에서의 일시 및<독립선언서>배포 절차를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도 서울을 따르게 할 것. ④<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기초와<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담당할 것. ⑤<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분송은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서 각각 담당할 것. ⑥ 일본 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의 양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측에서 담당하여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측에서 담당하여 보낼 것. ⑦ 조선민족대표로서 각 서면에 연명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십 수 명을 선정하도록 할 것. ⑧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도도 연명에 참가시킬 것.
최린은 기독교측과 연대를 성사시킨 후 운동의 민족적 통일체를 완성하기 위하여 불교측에 대해서도 교섭상대를 물색한 끝에 2월 24일 밤 서울 재동 43번지 韓龍雲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시국관을 떠보며 의향을 확인한 후 그간의 진행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불교측에서도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시일이 촉박하고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불교측에서는 한용운과 白龍城 두 사람만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하에서 많은 불교인들이 친일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혁신운동을 통하여 민족불교의 확립과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던 이 두 사람은 당시의 민족불교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한용운은 월간지≪唯心≫을 발간하면서 청년 계몽활동을 펴고 있었던 까닭에 불교 청년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618)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연대를 이룩한 위에 儒林과의 연대를 이루어야 완전한 민족운동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유림의 대표격인 김윤식·윤용구 등은 초기에 민족대표로 나서 줄 것을 교섭하려 접촉을 시도했을 때 참가를 거절하거나 소극적이었으며, 한용운이 지방 유림의 대표격인 郭鍾錫을 경남 거창으로 방문하여 접촉을 시도했으나, 촉박한 시간과 일제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또한 경북 성주의 金昌淑에게도 成泰英을 통해 독립운동계획을 알려 주고 유림으로서 참여를 권유했으나, 모친의 병환 때문에 2월 그믐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다음날 발표가 예정되어 連署를 할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 이에 김창숙은 유교 대표가 참여하지 못한 것을 통곡하며 아쉬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가운데 천도교·기독교·불교의 3교만 통일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림들은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할 기회를 놓쳤으나, 많은 지역에서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여차 상경하여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하여 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계 인사들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데에는 일제에 의해 모든 사회 단체가 해산당하였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어 다른 조직이 없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이 탄압을 피해 해외 망명함으로써 국내의 대중들과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조직적인 힘은 종교단체와 학교뿐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큰 자극을 받아 이에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하고자 비밀리에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박희도와 이갑성은 독립운동을 위하여서는 학생층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보고 1919년 1월 하순 경 연희전문학교 金元壁, 보성전문학교 康基德, 경성의학전문학교 韓偉健·金炯璣, 경성공업전문학교 朱鍾宜, 경성전수학교 김공후를 서울 시내 관수동 중국요리점 大觀園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학생들이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이갑성은 따로 2월 12일과 14일 음악회를 가탁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 자택에서 김원벽·김형기·尹滋瑛·金文珍·裵東奭·한위건 등 전문학교 학생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독립운동의 추진을 격려하였다. 박희도는 종교계의 독립운동 추진에 참여하면서 강기덕·김원벽 등과 만나 운동준비의 진전 상황을 알려주며 학생단의 결속을 격려하였다. 이들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은 2월 20일 경 승동 예배당에서 제1회 학생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다음사항을 합의하였다.
① 각 학교의 제1선 대표자로 전성득(경성전수학교)·김형기(경성의학전문학교)·김문진(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金大羽(경성공업전문학교)·강기덕(보성전문학교)·김원벽(연희전문학교)을 선정하여 각자가 그 학교를 대표한다. ② 위의 각 학교 대표가 일제 관헌에 체포되는 경우 뒷 일을 처리하며 다른 방면의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제2선 책임자로 李容卨(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한위건(경성의학전문학교)·윤자영(경성전수학교)·韓昌桓(보성전문학교) 등을 선임한다. ③ 위의 제1선 각 학교 대표들과 제2선 책임자들은 각 학교별로 각각 동창 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3·1운동 재판기록-, 1983, 69쪽).
2월 23일 박희도는 김원벽을 만나 각 학교 대표자들이 종교계 대표들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종용하여, 승낙을 얻었다. 종교계 지도자들은 3월 초 독립선언을 하고 시위운동을 개시하도록 결정하여 학생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학생단 대표들은 2월 25일 정동예배당 李弼柱 목사 방에서 위의 대표자들과 한위건·한창환·윤자영 등이 모여 3월 1일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생은 모두 파고다 공원에 집합하여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하고, 그 후 형편에 따라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2월 26일 김문진·이용설·윤자영·金鐸遠·崔景河·羅昌憲·朴潤夏·金榮洮 등과 기타 전문학교 대표자들이 다시 이필주 목사의 집에 모여 제2회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제1회, 제2회 독립운동에서 체포를 모면한 학생들은 뜻을 굽히지 말고 더욱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최후의 목적을 완수할 것을 결의하였다.619)
한편 이런 준비과정과 함께 학생단 대표들은 각자가 중등학교 대표자들을 살펴보고 학생들을 결속하기 위해 김원벽은 경신학교 강우열·姜昌俊, 경성고등보통학교 朴快仁 등을, 강기덕은 평안도·함경도 출신으로 조직된 서북친목회의 회원임을 활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2월 초부터 경성고등보통학교 金栢枰·朴老永, 중앙학교 張基郁, 선린상업학교 李奎宋, 보성고등보통학교 張彩極·全玉玦 등을 안국동 박희용의 집에 초대하여 각자 학교의 학생들에 대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한 날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였다. 각 중등학생들도 이에 찬성하여 그 때가 오는 것을 고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학생단 또한 종교계와 함께 민족대연합전선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학생들은 민족대연합전선의 전위로서 3·1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33인 민족대표의 선정과정은 다음과 같다. 천도교에서는 孫秉熙·崔麟·權東鎭·吳世昌 4인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논의를 진행해 오다가 2월 25, 26일 이틀에 걸쳐 교회간부 11인에게 알려 15명의 천도교측 민족대표를 선정하였다. 천도교측 15인은 위 4인과 함께 중앙의 權秉悳·梁漢黙·李鍾一·李鍾勳·洪秉箕·金完圭와 당시에 상경해 있던 평양의 林禮煥·羅仁協, 용강의 洪基兆, 중화의 羅龍煥, 임실의 朴準承이었다.
기독교에서는 26, 27일에 걸쳐 비밀회합을 거듭한 결과 장로교에서는 정주의 李昇薰·金秉祚·李明龍, 평양의 吉善宙, 선천의 梁甸伯, 의주의 劉如大, 서울의 李甲成, 감리교에서는 평양의 申洪植, 서울의 朴熙道·李弼柱·申錫九·吳華英·金昌俊, 원산의 鄭春洙, 해주의 崔聖模, 기독교신보사의 朴東完 등 대표 16인으로 선정되었다. 불교에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韓龍雲과 白龍城 2명이 선정되었다. 그 밖에도 운동의 준비과정에 참여했던 인물 중에서 자금을 담당했던 천도교의 朴仁浩·盧憲容, 천도교와의 연대과정에서 이승훈과 더불어 기독교계의 대표로서 활약했던 咸台永, 수원의 金世煥 등은 후속적인 일을 위해 민족대표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인물까지 포함하여 민족대표 48인이라고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