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중부지방
가) 경기도
경기도의 만세시위운동은 개성을 제외하면 3월 중순에 들어가면서 점화가 시작되어 3월 22·23일 경부터 4월 초순까지 연일 시위가 계속되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하였다.
개성에서는 3월 3일부터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7일까지 매일 지속되었는데, 3일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 군중이 합세하여 1,5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음날에도 2,000명의 시위로 이어졌고, 6일에는 1,000명이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여 구금된 인사를 탈환하고자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일부터 개성에서는 다시 1주일간 계속되었다.
도내 다른 지역에서는 서서히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7일에는 시흥 읍내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동맹휴학, 9일에는 인천 읍내 만세시위, 10일에는 양평에서, 14일에는 양주에서 각각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초순의 이들 시위는 대개 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운동이 많았으나, 18일 강화 읍내 시위는 경기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위로서 2만 명이 모여 군청에 쇄도하고 붙잡힌 사람들을 탈환하였다. 강화군에서는 3월 13일 운동이 시작된 이후 4월 13일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양주 磨石隅里에서도 3월 18일 1,000명의 시위대가 붙잡힌 사람들을 탈환하고자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는 점점 열기를 띠어 공세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월 하순에 들어 이때까지 조용하던 고양·부천·용인·이천·김포·파주·포천·연천·광주·여주·장연 등지에서 일제히 시위운동이 펼쳐졌고, 시흥·진위·안성·양평·양주·가평 등 초·중순에 산발적 시위운동을 시작한 후 잠시 잠잠하던 곳에서도 3월 하순에 들자 시위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3월 하순의 시위운동은 곳곳에서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양상을 나타내었다. 3월 26일의 고양 纛島에서는 2,000명의 농민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3월 30일 시흥 읍내, 秀岩面, 31일 남면에서 각각 2,000명의 시위가 있었고, 3월 28일 수원 동남쪽이 있는 사강반도에서는 시위대에 무단 발포한 노구치(野口) 순사를 시위대가 뒤쫓아가 격살하였다. 4월 3일에는 장안면과 우정면민 2,500명이 연합시위를 벌여 장안·우정 두 곳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시위대가 화수리 주재소에 이르렀을 때 일제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여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도망가는 일경을 뒤쫓아가 타살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4월 15일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은 이러한 이 지역의 격렬한 시위운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날 오후 2시 반 경 일제 수비대는 제암리 감리교회에 주민들을 모이게 한 다음 문을 봉쇄하고 불을 지른 후 탈출하는 사람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23명, 인근 고주리까지 37명이 목숨을 잃었다.637)
안성군에서는 3월 31일 읍내에서 3,000명이 시위를 벌여 군청과 면사무소를 습격하는가 하면 밤에는 등불행진을 벌였으며, 군내 원곡면 1,000명의 주민들은 3월 25, 26일 경부터 매일 동리 단위로 만세를 부르다가 3월 31일 밤 원곡면 소재지에 집결하여 연합시위를 벌인 후 6km 떨어진 양성면 소재지로 나아가 양성면 1,000명의 군중과 합세하여 양성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고, 면사무소,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다시 이튿날 새벽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 사무소를 불태웠다.638)
용인군에서는 3월 30일 읍내에서 2,000명의 시위가 있었고, 3월 31일 외사면에서는 4,000명이 모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파괴하는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용인군에서는 릴레이 시위도 있었다. 시위는 3월 28일 모현면 초지리에서 시작되어 오전 7시에 포곡면 삼계리로, 삼계리에서 금어리로, 금어리에서 삼계리 사람들은 둔전리로 가고, 금어리 사람들은 내사면 대대리를 거쳐 감량장 방면으로 이어지면서 각 동리는 앞 지역 시위대로부터 태극기를 인수하고 시위운동을 이어갔다.639)
이러한 2,000에서 3,000명의 대군중이 모여 벌인 시위운동은 이 밖에도 3월 23일의 김포군 양곡, 27일 강화 읍내, 파주 교하, 28일의 파주 봉일천, 광주 읍내, 30일 파주 광탄면, 31일의 양평 용문면 광탄리, 포천 신북면, 송우리 시위, 4월 1일의 여주 이포, 장연 진동면 및 강상면, 3일 양평 읍내, 4일 양평 곡수, 5일 양평 석곡 등 규모가 크고 양상이 공세적인 시위운동이 줄을 이어 3·1운동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3월 23일부터 4월 14일까지 경기도 여러 지역에서 산상 횃불시위가 전개되었다. 고양군·시흥군·광주군·부천군·수원군·개성군·강화군·장단군·파주군·김포군·양주군·진위군·이천군·여주군 등에서 횃불시위가 일어났다. 수원에서는 상인들이 철시시위, 기생들도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경기도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한 지역의 하나였다.
나) 충청남도
충청남도에서는 예산에서 3월 3일, 부여에서 7일, 논산에서 10일 등 3월 초순에 시위가 시작되었으나, 중순까지는 산발적인 시위가 진행되다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공주·연기·대전·논산·홍성·청양·서산·예산·아산·천안 등지에서 치열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천안군 병천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일제의 발포로 인해 많은 인명이 손상되었다. 공주·연기·대전·논산·예산·아산·천안 지역은 3월 초·중순에 산발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가 휴지기를 거친 다음 3월 하순에 가서 다시 뜨겁게 타오른 지역이었고, 서천·홍성·청양·서산·당진군은 3월 하순에 가서야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런 반면 부여에서는 3월 초에 수십 명의 시위로 그쳤다.
충남 최초의 시위는 예산에서 3월 3일 일어났다. 이발사 尹七榮 등 5명이 밤 11시에 동쪽 산위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이후 13일 대흥에서 500명, 4월 3일 고덕면 대천에서 1,000명, 신례원 300명, 4일 덕산에서 700명 시위가 있었는데, 고덕면 대천시장시위에서 일본헌병의 발포로 1명이 숨지자, 시신을 들쳐메고 주재소로 나아가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며, 덕산에서는 구금된 시위 주도자를 탈환하려고 하였다. 같은 날 광시면에서는 4,000명이 모여 면사무소를 습격 파괴하였다. 5일 예산읍내에 2,000명의 시위운동이 전개되어 3명이 부상하고 35명이 체포되었다.
공주에서는 3월 11일 1차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일군경의 저지를 받아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14일 유구에서는 공주군 신상면 천도교인 黃秉周의 주도로 500명의 장꾼들과 시위운동을 벌였는데, 일경이 황병주를 붙잡아 가자 시위대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5일의 읍내에서는 300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4월 1일 정안면 석송리 주민들은 6km 떨어진 면 소재지 광정리까지 나아가 연도의 미송리·운궁리 주민들과 합세하여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천안에서는 3월 14일 목천 보통학교 시위로 시작되어 20일 입장 양대리 700명 농민, 28일에는 양대리 직산 금광 노동자 200명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29일 천안 읍내에서는 3,000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인근 풍세·성환 등지에서도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1일 갈전면(현 병천면) 병천(아우내)시장에서 3,0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는데, 유관순의 활약으로 유명한 시위지역이다. 이곳 시위에서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유관순의 아버지 柳重權 등 2명이 사망하자 주민들은 시체를 메고 헌병주재소로 나아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다시 일경이 총격이 가해 이 시위운동에서 19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대전군에서는 3월 27일 200명, 4월 1일 400명이 장날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벌여 4월 1일의 시위에서는 일본군이 발포로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성에서는 3월 16일에 이어 4월 1일에는 70명이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였다. 3월 29일 가수원, 31일 유성에서 각각 400∼200명의 시위가 있었다.
논산군에서는 3월 10일 강경읍 장날을 기해 5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1일 두계 1,000명, 27일 읍내 700명, 4월 3일 천동리 200명 시위에 이어 노성에서 2,000명의 시위가 있었다. 4일 강경읍내에서 500명의 군중들이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3명이 목숨을 잃고 1명이 부상하였다.
연기군에서는 3월 13일 전의면 150명 시위 이후 26일부터 봉화시위가 확산되었고, 30일 조치원에서 1,500명이 참여한 봉화시위가 있었다.
홍성군에서는 3월 7일 홍성읍 시위 이후 21일 은하면 대천에서 시위운동이 있었으며, 4월 7일 500여 농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튿날 밤 60여 명의 농민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4일 밤에는 홍성면·홍북면·금마면·홍동면·구항면의 5개 면 24개 촌락에서 횃불시위를 벌였다.
청양군에서는 4월 5일 안심리 1,000명 시위, 정산 700명 시위, 6일 운곡 600명 시위, 이튿날 와촌리 500명, 8일 비봉면 600명 시위 등이 있었는데, 운곡과 와촌리 시위는 공세적인 시위양상을 띠었다.
서산에서는 3월 16일과 27일 읍내에서 시위운동이 있었고, 해미면에서는 3월 19일과 24일 있었는데, 정미면 天宜시장에서는 4월 4일 1,000여 시위대가 일제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여 파괴하였으며, 8일 밤에는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대호지면에서는 3월 19일에 이어 4월 8일 600명이 시위운동을 벌이자 일경이 발포하여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운산면에서도 같은 날 농민 400명이 횃불을 올리고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일경이 발포하여 2명이 순국하였다.
서천군에서는 3월 29일 마산면 신정리 장터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송기면 등 주도자 6명이 체포되자 시위군중이 경찰관출장소를 부수고 구금된 6명을 구출하였다.640)
아산군에서는 온양면에서 3월 12일 200명이 시위를 시작하여 14·15일 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31일 온정리에서는 염치·배방·온정 각 동리 2,500명이 부근 산상 50여 개소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4월 2일 신창면에서는 밤에 동리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뒤 내려와 헌병주재소와 보통학교 기물을 파괴하였다. 4일 선장에서는 헌병주재소에 쇄도하여 8명이 부상하였다.
당진군에서는 면천 보통학교 학생 200명이 3월 10일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며, 4월 4일 밤 면천면 8개 리, 당진면의 농민들이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합덕면에서는 4월 2일, 송악면에서는 5일 수백 명이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충남의 경우, 탄압이 가해지면 오히려 물러서지 않고 더 강한 저항정신을 보여 주었다.
다) 충청북도
충북의 만세시위운동은 비교적 늦은 3월 중순에 가서야 청주·제천·괴산에서 본격적인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하순에 들어 영동·옥천·보은·음성·진천·충주 등지에서도 일어났고, 청주와 괴산에서는 며칠의 휴지기를 거쳐 다시 활발하게 타올랐는데,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이 모여 헌병 또는 경찰주재소에 압박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산상에서 횃불을 올리며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청주군에서는 3월 7일 읍내와 21일 북일면에서 시위움직임이 있었으며, 23일에는 강내면 18개 동리, 강외면·옥산면 일대 수십 군데 산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1일과 2일에도 봉화시위는 청주 부근 오창·강외·부용 각 면으로 퍼져 나갔다. 3월 30일 미원면 시장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일본 헌병주재소에 쇄도하여 일군과 충돌함으로써 현장에서 1명이 즉사하고 수명이 부상하였다. 부용리 1,000명의 주민들은 31일 부강리 역 앞에서 시위운동을 벌이다 일본군의 발포로 수 명이 숨졌으며, 문의면에서는 4월 6일 1,300명이 시위를 벌였다.
괴산에서는 3월 19일 괴산시위를 洪命熹가 주도하여 격문과 경고문을 준비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600명이 시위운동을 벌이며 경찰서로 쇄도하여 구금자를 탈환하고자 투석 등으로 일경과 맞섰다. 충주에서는 일군 수비대가 와서 밤 10시 경에야 해산을 하였다가 다시 모여 새벽 2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3월 24일·29일, 4월 1일 계속해서 괴산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읍내의 3차 시위에서는 1,500명이 참여하였다. 3월 30일 청안, 4월 1일 읍내에서 각각 3,0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청안에서는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전선을 절단하였으며, 청천에서도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0일 공덕리 주민 300명이 군 초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영동군에서는 3월 25일과 29일의 학산면 농민들과 부역민들이 경찰관주재소를 습격, 기물을 파괴하는 공세적 시위를 벌였으며, 4월 3일에 다시 500명의 시위대가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군내 여러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벌였다. 4월 2일 매곡의 100명 시위대는 추풍령 헌병초소에서, 3일 괴목에서는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였다. 4일 읍내에서는 2,000명의 농민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압박하는 군내 최대의 시위가 있었다. 6일에는 추풍령 시위가 일어났다.
옥천에서는 3월 27일 이원면 700명의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4월 2·3일 연속 일어난 1,000명의 청산시위가 규모가 컸다.
보은에서는 4월 3일부터 100명 내외의 시위가 이식리·읍내·구인리·무서리·선곡리에서 각각 일어났다. 제천에서는 17일 읍내에서 1,000명의 시위운동이 일어나 3회에 걸쳐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충주에서는 4월 1일 신니면에서 龍明書堂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00명의 시위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음성군에서는 읍내 장날을 기하여 3월 18·28일 수천 군중이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4월 1일 소이면 시위에서는 1,000명의 시위대가 주재소를 포위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충주 수비대가 출동하여 무단 발포함으로써 12명이 숨지고, 40명이 부상당했으며, 같은 날 대소면에서도 1,000명이 시위운동을 벌여 2회에 걸쳐 면사무소,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제의 발포로 6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당하였다.
진천에서는 4월 2∼3일에 걸쳐 공세적 시위가 계속되었는데, 2일 석현에서 500명의 시위대가, 장양리에서 200명의 시위대가 각각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고, 광혜원에서는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500∼600명의 시위대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충청북도의 시위운동은 초기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가 마치 독립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라) 강원도
강원도의 만세시위운동은 3월 2∼4일 사이에 평강·금화·철원·화천지역에<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0∼12일 철원·금화에서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은 3월 하순이 될 때까지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3월 23일 화천에서, 27일 횡성과 원주에서 시위운동이 시작되면서 도내 전역에서 동시다발의 시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철원에서는 3월 10일 읍내에서 1,000명의 농민들이 시위운동을 벌였고, 11일 철원 읍내 700명 시위, 12일 지포의 800명 시위로 이어졌다. 4월 8일 내문면에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800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금화군에서는 3월 12일 읍내에서 1,000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후 휴지기에 들어갔다가 28일과 29일 이틀에 걸쳐 昌道에서 기독교인과 농민 500명이 헌병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는 시위를 벌였다. 4월 4일에는 下所里에서 300명의 시위가 있었다.
화천에서는 3월 4일 읍내에 선언서가 배포되었고, 23일 읍내에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60명이, 28일에는 상서면에서 천도교인과 농민 2,000명이 시위운동을 벌여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원주·양양·통천·홍천·횡성 등지에서 3월 하순에 들어 지속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원주군에서는 3월 27일 서당생도 중심의 시위 움직임이 있었고, 이후 4월 3일부터 읍내를 비롯해서 소초·귀래면·건등면·지정면·업면·운남면 등지에서 100∼200명의 시위가 이어졌다.
통천에서는 4월 3일 장전에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40여 명이 시위를 시발로 6일에는 庫底에서 1,500명의 노동자·농민이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를 공격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고, 7일에도 200명이 같은 양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천에서는 주로 천도교인이 주도하여 4월 1일 읍내에서 200명이 시위한 데 이어, 같은날 북방면에서 시위가 있었다. 2일 읍내 200명, 물걸리 800명, 3일에는 성수리 800명의 시위가 있었고, 도관리에서는 4월 3일과 11일에도 시위가 있었다.
횡성군에서는 읍내에서 3월 27일 300명, 4월 1일 1,300명, 2일 500명의 시위가 이어졌는데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일제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공세적 시위를 벌였다. 특히 4월 1일의 읍내시위에서 2회에 걸쳐 일제 관공서와 상점을 파괴하였는데, 일병의 발포로 2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당하였다.
강원도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운동은 양양에서 일어났다. 4월 4일부터 9일까지 읍내에서 4회, 물치·손양·車馬·其士門·西面 등에서 1천 수백 명에서 200∼300명에 이르기까지 시위운동이 지속되었는데,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향촌 양반 유지들이 연합하여 전주민의 시위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밖에도 울진·간성·이천·평창·정선·삼척·회양 등지에서도 4월 중순에 접어들며 소규모나마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강원도 시위운동은 천도교인과 일반 지식인, 청년과 학생, 유생, 기독교인과 의병 출신들이 주동하였다. 특히 의병 출신자들은 술장사나 화전민으로 숨어살다가 3·1운동이 발발하자 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꾼이 등장하여 인근 지역을 돌며 시위운동을 확산해 갔던 것도 특징이었다. 양양과 삼척에서는 유림들이 향촌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대규모의 공세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