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Ⅲ. 3·1운동2. 3·1운동의 전개2) 3·1운동의 발발(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
            • (2) 사법기관
            • (3) 군대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그 성격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1) 관권의 농사 개입
            • (2) 면화재배의 강요
            • (3) 식민지적 수탈의 강화
            • (4) 몰락 농민의 증가
            • (5) 한국농민의 저항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 4) 광업과 어업의 장악
            • (1) 광업의 장악
            • (2) 어장의 장악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 (2) 재정의 재편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 (4) 노동구조와 노동쟁의
          • 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 8) 무역의 대일 종속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1)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병합∼3·1독립운동)
            • (2)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3·1독립운동∼중일전쟁)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 2) 조선 총독의 권력
          • 3) 식민지 통치구조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 (2) 풍기광복단
            • (3) 민단조합
            • (4) 이증연의 비밀결사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 (2) 조선국권회복단
            • (3) 조선산직장려계
            • (4) 단천 자립단
            • (5) 영주 대동상점
            • (6) 송죽회
            • (7) 애국창가집 편찬, 배포와 관련된 민족교육투쟁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 (2) 선명당
            • (3) 흠치교의 비밀결사
            • (4) 청림교의 비밀결사
            • (5) 조선국민회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2)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3) 북만 밀산부지역
          • 2) 러시아
            • (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 4) 미주
            • (1)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한인단체의 결성과정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 (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 5) 일본
            • (1) 1910·20년대 재일 조선인의 상태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3) 2·8운동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 3) 독립운동의 새 기운
          • 4) 국내 상황
            • (1) 식민지 지배의 압박과 고통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 (2) 2·8독립선언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 (2)<독립선언서>준비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2) 러시아 연해주
            • (1)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 (2) 파리 강화회의 대표파견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 (4)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의 전개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 3) 미주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 (2) 미국
            • (3) 영국
          • 2)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 (2)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라. 남부지방

가) 전라북도

 전라북도에서는 초기·중기·후기에 걸쳐 산발적인 시위운동이 이어졌다. 군산·옥구·익산·전주 등지에 3월 3∼4일에<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군산에서 영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5일 수백 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는데, 23일에는 군산보통학교에 불이 났고, 28일에는 읍내 大和町에 다시 불이났다. 익산에서는 3월 3일에 선언서가 배포되고, 4월 4일 이리에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700명이 시위를 벌여 시위도중에 발포로 인해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39명이 체포되었다.

 전주에서는 3월 4일 선언서가 배포되고, 13일 천도교·기독교인 150여 명이 시위를 벌인 데 이어 14일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600명이 시위를 벌여 90명이 체포되었다. 김제에서는 4월 4일 600명이 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는데, 만경보통학교 교사 林昌茂가 이를 주도하였다. 금산에서는 3월 23일부터 31일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에서 200명까지 만세시위가 읍내와, 제원리·복수면·진산면 등지에서 있었다.

 남원에서는 4월 3일 800명의 덕과면 농민들이 경찰관주재소에 쇄도하는 등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시위는 덕과면장 이석기가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4일에는 읍내에서 1,000명의 농민들이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여 일제의 발포로 5명이 목숨을 잃고 수명이 부상당하였다.

 임실에서는 3월 10일 獒樹공립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15일부터 23일까지 거의 매일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청웅면에서는 100∼200명이 15·16·17·21일 계속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밖에 지사면·오수면·읍내 등지에서 시위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23일 오수면 시위는 1,200명이 모여 주재소와 면사무소, 일인 가옥을 습격 파괴하는 공세적 양상을 보였다.

 그 외에 진안·부안·순창·무주·장수·정읍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한두 차례 있었다. 대체적으로 전북의 시위운동이 타지역과 달리 규모도 적었고, 크게 치열하지 않았던 것은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때의 가혹한 탄압의 경험과 더불어, 일제가 이 지역 평야지대에 토지의 수탈, 일인 농장의 개설, 일인들의 대거 植民 등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이 감시받는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 전라남도

 전라남도의 시위 전개 유형은 전라북도와 비슷하다. 3·1운동 전 기간에 걸쳐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전국에서 가장 약한 편이다. 3월 3∼4일에 걸쳐 목포·광양·구례·순천·여수·광주 등지에<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0일부터 광주 읍내에서 최초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 후 영광·해남·담양·무안·순천 등지에서 시위가 뒤따랐으나,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많았으며, 각 군의 읍내와 2∼3개 처에서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그쳤다. 3월 하순에 들어 목포·곡성·함평·광주·광양·보성·강진·해남·장성·완도·순천·영암 등지에서 1∼2차례 시위가 일어난 후 이 지역의 3·1운동은 끝났다.

 광주에서는 3월 3일<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0일 숭일학교·수피아 여학교 등 각급 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500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교사·학생 87명이 禁束되었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黃尙鎬는 독립사상을 널리 고취하기 위하여 13일≪조선독립광주신문≫제1호를 발간하고 그 후 계속하여 제4호까지 발간, 배포하였다. 광주에서의 시위운동은 10일에 이어 11일에도 300명의 시위, 13일에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4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고, 16일에는 송정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후 4월 8일 50여 명의 보통학교 상급생들이 동맹휴교를 했다.

 영광에서는 3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읍내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운동을 벌였다. 15일의 시위는 500명이 참여하는 큰 시위였다.

 해남에서는 3월 14일 읍내에서 300명의 시위가 있었는데, 일제의 발포로 해산되었다. 그 후 4월 8일과 11일 다시 시위운동이 있었다.

 무안에서는 3월 18일 長山島에서 유지인사 3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20일 외읍면 구 무안 장터에서 친일파의 자숙을 촉구하며 독립경축행진을 하였다.

 담양에서는 3월 17일 읍내 청년들이<경고문>을 준비하고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4월 4일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순천에서는 3월 3일 읍내에<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9일 최초의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4월 7일에도 산발적인 시위운동이 읍내에서 일어났다. 12일에는 인월리에서 소수의 시위가, 13일에는 낙안면에서 군내 가장 큰 규모인 150여 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는데 일경의 발포로 4명이 부상당하였다.

 곡성에서는 3월 29일 읍내에서 교사와 보통학교 학생 200명의 시위가 있었다.

 광양에서는 3월 3일<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27일과 4월 1일 다수가 모인 가운데 시위운동이 있었다.

 장성에서는 4월 3일과 4일 북이면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는데, 연인원 300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운동을 벌였으며, 4일에는 헌병주재소에 쇄도하는 등 치열한 시위운동을 벌여 첫날 4명, 둘째날 12명이 구금되었다.

 강진에서는 4월 4일 읍내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완도에서는 7일 읍내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운동을 벌여 50명이 구금되었다.

 목포에서는 3월 3일<독립선언서>가 읍내에 배포된 후 4월 8일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함평에서는 4월 8일 서당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보성에서는 4월 9일 벌교에서, 18일 보성면에서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 영암에서는 4월 10일 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4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영광에서는 3월 14일 읍내에서 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120명이, 3월 15일에는 시위규모가 더 커져 500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시위운동이 있었다.

다) 경상북도

 경상북도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초기와 중기에 안동과 의성·영덕군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시위운동이 상주·예천·영주·봉화·문경·성주·청도·선산 등지에서 주로 일어난 후기 산발적인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대구에서는 3월 8일 오후 3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명, 계성학교 학생 50명, 명신여학교 학생 50명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서문시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동성동에서 일본 군경의 저지를 받고 일단 해산한 다음 밤 8시 경 약 80여 명이 다시 경찰서로 쇄도하여 붙잡힌 학우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음날인 9일과 10일에도 시위운동이 계속되었으며, 30일에는 주요 상점들이 폐점함으로써 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영일군 포항에서 3월 11일<독립선언서>가 읍내에 나붙고, 22일 일단의 시위대가 시위운동을 벌였다.

 의성에서는 비안면에서 3월 11일 시위운동이 있었으며, 16일과 18일에는 읍내에서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 19일 桃里와 安平에서 각각 1,000명이 집결하여 경찰관주재소에 쇄도하였다. 일경 27명이 출동하여 이들의 발포로 2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천군에서는 3월 11, 24일 읍내에서, 4월 6일 개녕에서 또한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 경주에서는 3월 13일 읍내에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100명이, 칠곡에서는 같은 날 읍내와 안동에서 각각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

 안동에서 본격적인 시위운동은 3월 17일 일어났다. 예안면장 申相冕이 주도하여 예안읍 장날을 택해 1,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안동 읍내에서는 18일 오후 6시 경 10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19일 새벽 1시 약 2,000명의 군중이 군청과 재판소·경찰서 등에 투석을 하였으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다. 일군 수비병의 발포로 13명이 부상당하였다. 23일 읍내 장날 저녁 7시 30분을 기해 다시 한 번 2,000명의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에 나섰다. 일본 수비대는 시위군중에 무차별 발포를 하여 현장에서 14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하였다. 21일 임동면 鞭巷 장날을 기해 임동면 500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부르고 발포하는 일군경의 총검을 빼앗아 우물에 던져 버렸으며,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를 부르다 해산하였다. 같은 날 임하면민 100명은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고 온 林燦逸 등의 지휘하에 신덕리 경찰관주재소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숨지자, 분개한 군중들은 밤 11시 400여 명으로 불어나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투석을 가하여 건물 유리창과 기물들을 파괴하고 서류를 소각하였다. 같은 날 길안면 泉旨시장에서도 500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경찰주재소를 포위 투석하고 이튿날 다시 주재소 앞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22일 일직면민 약 200명은 望湖洞 동산 송림에서 시위운동을 하였으며, 임북면민 400명은 면사무소를 습격·파괴하였다. 같은 날 2,000명의 예안 시위대가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3월 18일 도산면 토계동에서, 24일 풍산면 풍산시장에서도 수십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덕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3월 18일 영덕읍내 장날을 기해 1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더욱 큰 규모의 시위운동은 영해읍내에서 일어났다. 정규하 등이 이끄는 2,000명의 시위군중이 영해 읍내 시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한 후 주재소로 쇄도하여 경찰 대검을 빼앗고, 주재소와 보통학교, 일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이들의 시위는 이튿날도 계속되었다. 헌병 분대장 이하 6명이 달려왔으나 제지하지 못하였다. 오후 5시 대구 보병 80연대 장교 이하 17명이 도착하여 시위군중에 발포하여 8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당하였다. 같은 날 영해읍 시장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한 200명은 병곡면 병곡시장으로 향하였다. 연도의 주민들이 합세하여 400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은 병곡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이 고압적으로 제지하자 돌, 몽둥이 등으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20일 창수면 오촌동·삼계동·신기동 주민들은 창수동으로 몰려가 창수주재소를 파괴하고 오후 7시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해산하였다. 4월 4일에는 남정면 장사동의 기독교인과 청년유지들이 100명의 시위대와 함께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영양군 청기면에서는 400명의 주민들이 3월 24일 청기동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 유리창을 파괴한 후 시가행진을 하다 오후 10시에 해산하였다. 25일 정오경 청기면 청기동·상청동, 입암면 금학동·대천동 주민 약 600명은 일군경의 경계망을 뚫고 영양읍내로 들어가 오후 5시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청송군에서는 영해지역에서 활약한 권태원이 이곳 기독교인과 더불어 3월 25일 진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6∼27일 현서면 화목시장에서 500명의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천군에서는 3월 26일 금소동에서 1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고, 4월 6일 신녕면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밤 11시 매양동 천변에서 읍내로 들어오면서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8일에도 다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상주군에서는 3월 23일 저녁 800명의 시위군중이 읍내 장터에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8일 화북면 장암동의 구장 이성범의 주도로 100명의 주민들은 文藏山臺에 올라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같은 날 화북면 운흥리 유지 김성희 등은 통고문 2통을 작성, 中伐里와 雲興里에 전달하고 9일 정오 100명의 농민을 모아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주군에서는 4월 2일 유림들과 기독교인이 합세하여 성주 장날을 기해 경산동 關帝廟 뒷산에서 수백 명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시가지 및 시장통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해가 지자 시위대는 서북쪽 산상으로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밤 11시 경에도 100명의 시위대가 시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고령군 덕곡면에서는 3월 29일 뽕나무 심기 부역에 나갔던 20명의 인부들이, 우곡면에서는 4월 6일 모진동민, 8일 대곡동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예천군 용문면에서는 4월 2일 밤 10시 경 100명의 주민들이 금곡동에 모여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풍양면 우망리 동래 정씨 일족 40여 명은 우망리 선록에 모여 밤새 독립만세를 불렀다.

 영주군 하리면 은산시장에서 4월 4일 오후 6시 경 시위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일본 수비대의 경계로 시위운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9일 풍기읍 시장에서, 11일 장수면 동리 고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갔다.

 봉화에서는 3월 18일 내성읍 장날을 기해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곧 일제 군경의 검속을 받아 시위를 주도했던 내성공립보통학교 교사·학생 12명이 검거됨으로써 차단되었다. 4월 5일 춘양면 서벽리 동산에서 정태준 등이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청도군에서는 3월 18일 金鎭孝 등 청년들이 시위운동을 준비하다 주재소에 호출을 받아 조사를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각 동리를 다니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밖에 매전면 장연동·대성면 거연동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문경군 신북면 갈평 시장에서는 4월 15일 도로부역에 나왔던 인부 40명이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라) 경상남도

 경상남도의 시위운동은 초기에는 부산과 마산에<독립선언서>가 배포되는 데서 그쳤으나 3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거세게 불타오르기 시작하여 후기에까지 치열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부산에서는 3월 3일 府內에 선언서가 배포되고, 11일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1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4월 3일에도 기독교인 중심의 100명이, 8일에는 다수의 각급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이 있었다. 당시 부산부는 일본인들의 침략거점이었던 까닭에 거주민의 78.7%인 27,900명이 일본인들이었다. 따라서 격렬한 시위운동은 전개되지 못하였다.

 마산에서도 3월 3일<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12일 기독교 계통의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전직원이 일제히 사직하였다. 21일 구마산 장날, 2,000명의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26일 제2차 시위운동이 구마산 석정동에서 일어났으며 31일 제3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4월 2·23·24일에는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래군에서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200명의 시위대가 3월 13일 동래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18일 밤 9시 다시 수십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래경찰서로 쇄도하였다. 같은 날 동래 범어사의 명정학교(초등과정)와 지방학림(중등과정) 학생들이 동래 서문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29일 구포시장에서 장꾼 2,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일경이 주도자를 구금해가자 시위대는 주재소로 돌진하여 주재소 기물을 파괴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 4월 5일 기장읍 기장 장날을 기해 약 300명의 시위군중이 “양심발원 인도적 자유민족”이라 혈서로 쓴 大旗를 앞세우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8일 노동자와 부인들이 주도하는 시위운동이 벌어졌고, 10일 저녁 9시 1,000명의 군중이 시장에 모여 새벽 1시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날 장안면 좌천리 5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창녕군 영산면의 具中會·金秋銀·張振秀 등이 중심이 된 23인 결사대는 3월 13일<決死團員盟誓書>에 서명하고, 시장통에서 600명의 장꾼들과 함께 시위행진을 벌였다. 창녕경찰서에서 주도인물들을 구금하자, 저녁 8시 구금자 석방을 위해 창녕읍으로 나아갔다. 중간에 일경의 저지를 받은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가 이튿날 창녕 읍내에 잠입하여 시위운동을 벌이다 주도자 모두 구금되었다.

 의령군에서는 3월 14일 具汝淳이 중심이 되어 1,000여 명이 시장통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15일 다시 1,000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여성시위대도 이에 동참였다. 이날 부림면 신반리에서, 16일에는 지정면 봉곡리에서도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통영군에서는 청년 18명이 주도하여 3월 13일<동포에게 격하노라>라는 격문을 등사하고, 시위운동을 준비하다 사전 발각되었다. 18일 통영 중앙시장에서 다수의 시위운동이 있었으며, 28일 다시 150여 명이 통영시장에서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결집되어 4월 2일 통영장에서 4,000여 명이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벌였다. 상인들은 점포를 닫고 동참하였다. 이때 藝妓組合 기생 33명도 태극기를 들고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밀양군에서는 3월 13일 尹世冑 등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밀양 장날을 기해 1,000명의 시위대를 이루어 시가행진을 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명이 다시 시위운동을 벌였다. 4월 2일에도 보통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4일 단장면 대룡리 단장 장날을 기해 1,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표충사 승려 李章玉 등 승려들이 주도한 이 시위는<독립선언서>를 시위군중에 뿌리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해 갔다. 총검으로 해산을 강요하는 일군에 대하여 투석으로 맞섰다. 오후에 다시 수차에 걸쳐 주재소를 공략하였다. 이 시위로 364명이 검거되어 71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6일 부북면 춘화리에서 주변 동리민들이 모여 징과 나팔을 울리면서 시위운동을 벌였고, 밤에도 산상에 모닥불을 피우고 징·북을 울리며 밤새 만세시위를 벌였다.

 진주군에서는 3월 18일 진주읍내 장날을 기해 오후 1시 비봉산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읍내 3개 구역에서 일제히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3,000여 명의 장꾼이 호응하는 가운데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오후 7시 ‘노동독립단’이, 2시간 뒤에는 ‘걸인독립단’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튿날 진주읍내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다. 11시 경 5,000명의 시위군중이 다시 시위운동에 돌입하였다. 일군경의 총검의 위협과 난타에 투석으로 맞섰다. 이때 ‘기생독립단’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날 밤 11시까지 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전날 66명에 이어 이날 200명이 구금되었다. 20일에도 600명이 경찰서에 쇄도하였다. 21일에는 1,000명이 다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일과 8일에도 소수의 시위운동이 있었고, 18일 호송중인 피고인들을 탈환하고자 2,000명이 시위운동을 벌여 일군의 발포로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

 합천군에서는 3월 18일 최초의 시위가 다수의 농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삼가 장터에서 있었다. 19일 합천읍내 장터에서 시위운동이 발발하여 16명이 검거되었다. 이튿날 읍내에서 전날 구금된 16인의 석망을 요구하며 합천경찰서로 쇄도하여 일경의 발포로 4명이 죽고 11명이 부상하였다. 20일 대병면 창리에서 3,000명의 인근 일대 주민들이 모여 시장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한 후 경찰관 주재소에 쇄도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부상자가 생기자 시위군중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문서들을 소각하였다. 21일 초계면 초계시장에서는 3,000명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약 200명의 청년대원들은 우편소를 습격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22일 묘산면 팔심리와 도옥리 주민 100여 명은 묘산면 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23일 가회면·상백면·삼가면민 1만여 명이 삼가시장에 집결하였다. 상백면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상백면 사무소를 파괴하고 삼가시장으로 집결하였다. 삼가면 錦里 正衿堂 앞 광장에서 일제에 대한 규탄연설이 이어지고 있을 때 일본군의 발포로 연설하던 임종봉이 굴러 떨어졌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몽둥이와 낫을 들고 경찰관주재소와 우편소로 들이닥쳤다. 일경은 이들에게 총격을 가해 13명이 즉사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31일 해인사 지방학림 학생과 승려 200명이 해인사 홍하문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1시 해인사주재소로 몰려갔다가 일경의 발포로 물러 나온 후 밤 11시 경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 앞 도로상에서 다시 시위를 벌였다. 4월 3일 가야면 梅岸里 주민 100명이 노상에 獨立旗를 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4일 가야산 위에서 400명의 주민이 독립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로 쇄도하였다.

 하동군 적량면장 朴致和는 3월 14일 사표를 제출하고, 18일 하동읍 장날을 기해 11인의 동지들과 함께<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23일 읍내 장날을 기해 제2차 시위운동이 있었으며, 28일 600명의 장꾼이 제3차 시위운동을, 4월 7일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4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옥중면 안계리에서는 3월 24일 안계 장날을 기해 600명이 태극기를 주재소 정문 앞에 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29일 진교면 진교리 시장에서 700명이 시위운동을 벌이며,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4월 6일 다시 진교리 시장에서 700명이 봉기하여 저지하는 일군들을 포위하고 총기를 빼앗기도 하였다. 고전면 舟橋里에서는 朴永黙 등 33인이 一身團을 조직하고 4월 6일 주교리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운동을 선도하며 저지하는 경관의 총검을 빼앗고 주먹세례를 가하는 등 치열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함안군에서는 3월 9일 칠북면 연개장터에서 경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17일 대산면 평림장터에서, 18일 칠서면 이룡리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 19일 함안읍 장날을 기해 약 2,000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무력 저지하는 경찰관주재소를 6회에 걸쳐 습격하였으며, 군청·등기소·우체국 등을 파괴하였다. 20일 군북면에서는 약 3,000명이 냇가에 모여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우체국·면사무소·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외쳤다.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21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다. 23일 칠원 장날에는 1,000명의 장꾼들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3일 다시 칠원 장터에서 1,300명이 제2차 시위운동을 벌였다.

 산청군에서는 3월 19일 신등면 단계리 시장에서 1차 시위운동을 벌인 뒤, 다시 20일 단계리 시장에서 600명의 시위군중이, 21일 단성면 성내리 시장에서 8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일병이 출동하여 무단 발포함으로써 사망 10명, 부상 50명의 인명손상이 있었다. 22일 산청읍내에서 5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거창군에서는 3월 20일 가조면 장기리 시장 장날을 택해 수백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시위대의 일부는 출동으로 비어있는 헌병분견대 기물을 파괴하고 밤늦게 주동인물 5, 6명을 이끌고 돌아오는 헌병과 보조원들을 기다려 난투극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22일 가조면·가북면 농민 약 2,000명은 헌병분견대에서 취조중이던 주동인물들을 구출하여 거창읍내로 향하였다. 시위행렬이 沙浦峴에 이르렀을 때 거창 헌병대와 가조분견대가 합세하여 위협하며 전진을 저지하였다.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무단 발포하여 4명이 숨지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사천군에서는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이 끝나는 때를 타서 학교운동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약 300명의 사천주민들은 진주읍내 시위에 참여하였고, 4월 13일 도로공사 인부 100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삼천포에서는 3월 25일 장날을 기해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1대가 노상에서 시위운동을 시작하고 제2대로서 청년대가 시장에서 3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 시위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창원군에서는 3월 23일 장날을 기해 5,000명의 장꾼들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4월 2일 다시 5,000명이 모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의 일원이었던 진전면 卞相泰가 중심이 된 진전면 시위대는 28일 진전면 고현리 시장에서 500명의 시위대와 시위운동을 벌이며 진동면 일본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증파된 일본군이 시위대를 총검으로 해산시켰다. 4월 3일 三鎭의거로 불리는 鎭田面·鎭北面·鎭東面 연합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 3,000여 명의 주민들이 진동면 주재소로 향하다 헌병대의 발포로 사망자 8명, 부상자가 22명에 이르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일본 헌병대에서 마산의 일인 병원에 부상자들을 치료하게 하였으나, 주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애국성금을 거두어 마산과 진주의 한국인과 미국인 경영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였다. 같은 날 웅천면 마천리에서는 500명의 주민들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웅천읍에 이르러 2,000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1일 가덕면 가덕진에서도 주민 3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29일 상남면 사파정에서 애국학생 수십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양산군에서는 3월 27일 읍내 장날을 기해 엄주태 등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2,000명의 장꾼들과 더불어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구타하고 주도인물을 구금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양산 헌병분견대와 군청으로 쇄도해 갔다. 주변부락에서 농악을 울리며 사방에서 군중이 모여들자 구속자를 석방하였다. 4월 1일 다시 1,500명이 주동인물들의 검거에 격분하여 헌병분견대 앞으로 쇄도하여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일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하였다.

 함양군에서는 3월 28일 함양읍 장날을 기해 2,000명의 농민들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4월 2일 2,000명의 시위군중은 제2차 시위운동을 벌이며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만세시위를 벌이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다가 무차별 총격으로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하였다. 3월 31일 안의면 안의 장날 1,000명의 시위군중이 저녁 7시까지 시장을 누비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고성군에서는 3월 30일 구만면 개천리와 마암리 동민을 중심으로 菊川沙場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10리 떨어진 배둔리 시장으로 가서 수백 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해산하여<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등사하여 ‘대한독립동맹’의 이름으로 배포하였다. 4월 1일 고성읍내 장날을 기해 삼산면의 천도교인과 읍내 노동자 6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김해군에서는 3월 31일 하계면 진영리 장날을 기해 5명의 청년들의 주도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4월 5일 진영 장날에 제2차 시위운동이 전개되어 약 2,000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며, 탄압을 가해 오는 일군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김해 읍내에서는 4월 1일 읍내 각처에 격문을 붙이고, 2일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군경은 재향군인, 일인 상인과 불량배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다. 생림면 봉림에서는 3일과 4일 이틀 연이어 각각 2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으며, 10일 명지면 중리에서, 11일 명지면 진목리에서 각각 시위운동이 있었다. 12일 명지면 진목리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장유면 茂溪里 시장으로 주민들을 이끌어 모아 2,000명의 시위군중을 이루어 북과 나팔을 울리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저지하자 헌병주재소로 돌입하다 일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였다. 격분한 시위대는 투석으로 헌병주재소를 파괴하였다. 김해에서 응원군이 도착하여 탄압이 가중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울산군에서는 4월 2일 언양면 남부리 시장에서 2,000명의 시위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여 제지하는 일본 군경과 투석으로 맞섰다. 일군의 발포로 3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당하였다. 4일 하상면 병영리 청년들은 ‘決死報國’을 혈서로 써서 맹서하고 일신학교 교정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본 경찰이 군대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를 해산시키자, 다음날 다시 일진학교에서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은 800명으로 늘어나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군경과 육박전이 벌였다. 온양면 남창리에서는 8일 남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의 장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남해군에서는 4월 3일 설천면민들이 남양리 노상에서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고현면에 이르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4일 읍내 장날을 기해 1,000명의 장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관주재소·군청·학교·우체국 등을 습격하였다. 7일 고현면 포상리에서 500명이 봉기하여 산상에서 만세를 부르고 남해읍으로 진격하여 시위운동을 벌이다 일군의 발포로 1명이 숨졌다.

마) 제주도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3월 21일 제주 읍내에서 4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고, 같은 날 朝天에서 서당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으며,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23일 제주읍내에서는 부인과 아동들을 중심으로 200여 명이 모여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25일에는 함덕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