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7당·5당 통일회의와 전국연합진선협회
양대 연합체인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은 중일전쟁의 와중에 통일점을 찾고자 나서고, 마침 중국 국민당정부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해 통합을 시도하게 된다.557)
蔣介石은 1938년 11월에 김구를, 이듬해 1월에 김원봉을 중경으로 초청하여 두 세력의 합작을 권유하였고, 이에 호응한 두 사람이 1939년 5월에<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였다.558) 그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지난날의 활동에 대한 반성과 현 정세분석이고, 둘째는 현 단계의 정치강령이며, 셋째는 전민족적 통일기구의 조직방법에 대한 의견이었다.559) 두 사람은 서두에서 과거의 투쟁이 통일된 단결력을 보이지 못하고 아울러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두 사람 모두가 조선민족의 해방이라는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협력할 것임을 밝혔다. 이어서 그들은 10개 항목의 정치강령을 밝혔는데, 주요한 내용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민주공화제 건설·국가적 위기에 기업의 국유화·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와 매매금지·노동시간 감소와 보험제도 실시·기본권 보장·의무교육 등이었다.
끝으로 두 사람은 중국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 조직방법에 대하여 ‘연맹조직론’이 아니라 ‘단일당조직론’을 주장했다. 두 사람이 합의점을 마련함에 따라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이하 7당통일회의)가 1939년 8월 27일 四川省 綦江에서 열렸다. 광복진선의 3당(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민족전선의 4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청년전위동맹) 등 7당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 김구·김원봉은<공개장>에서처럼 연맹조직론의 단점을 들추면서 단일당 조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전선에 소속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연맹조직론을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없음을 밝히고 결국 통일회의를 탈퇴함으로써 유회되고 말았다. 나머지 5당은 조직방식에 일치하고 있었으므로 공동으로 5당 통일조직을 먼저 완성하고, 다시 기타 소단체를 포괄하기로 수순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마저 곧 중단되고 말았는데,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는 결렬원인을 통일당의 당의·정책 등의 문제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파악하였다.560) 이 외에도 논쟁의 초점은 협동전선의 조직방식 및 기본이념에 대한 차이와 임시정부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561)
즉 7당통일회의가 결렬된 뒤, 5당회의에 의해 한 순간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된 것 같다. 1939년 9월 22일에 결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조직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민족혁명당이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562) 이것은 1920년대 후반기 유일당운동과 1932년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그리고 양대 연합체의 결성과 이를 통합하려는 일련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흐름을 또 한번 주저앉게 만든 일이었다.
557) | 진선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에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양대세력의 통합시도가 있기는 했었다. 그것은 1937년 11월에 김원봉이 민족전선을 결성하던 과정에서 김구의 광복진선에게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가 거절당한 일이었다. 당시 김구는 김원봉 세력이 중국공산당에 접근해 있고 인민전선파적인 경향이 농후하다고 하여 합류에 반대했다(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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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 | 內務省 警報局,≪社會運動の狀況≫11, 1047쪽. |
559)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37∼640쪽. |
560) | <綦江韓國7黨統一會議經過報告書>(≪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臺北: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89), 20∼22쪽. |
561) | 한상도,≪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한울, 2000), 271쪽. |
562) | 한상도, 위의 책, 27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