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대 정당체제의 재현
(1) 한국독립당
1940년 5월에 민족주의 정당들이 통합하여 ‘韓國獨立黨’을 결성했다.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우파 3당의 합당추진은 진선협회 이전인 광복진선 시기부터 논의되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완결되지 못한 단계에서 좌파세력과 단일당을 추진하면서 진선협회를 결성하기도 했으나, 곧 좌절되자 결국은 다시 우파 3당만의 통합을 추진한 것이다. 여기에다가 한국국민당에 비해 나머지 두 당의 정치노선이 약간 진보적이기는 했으나 큰 차이점이 없어 이론적 장애물이 없었다.
3당통합의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보다 진선협회의 결렬이었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의 통합체인 진선협회의 결렬은 민족주의 3당으로 하여금 그들만의 통합을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진선협회가 결렬된 직후인 1939년 11월에 임시정부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의 의결을 거쳐 그 해 말까지 3당통합을 실현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 담긴<독립운동방략>을 발표했다.563) 3당통합의 본격적인 움직임은 그 다음 해인 1940년 4월에 시작되었다. 4월 1일 중경 아래에 있는 綦江에서 3당 대표회의가 열려 광복진선의 3당을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5월 8일에 3당은<해체선언서>를 발표하고,564) 다음날인 9일에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것이 중경의 한국독립당이다.
통합한 한국독립당의 간부는 역시 3당의 간부들로 이루어졌다. 집행위원장에 김구, 집행위원에 홍진·조소앙·趙時元·이청천·金學奎·유동열·安勳(趙擎韓)·송병조·엄항섭·金朋濬·楊墨·조성환·차이석·李復源 등이었다. 그리고 감찰위원장에 이동녕, 감찰위원에 이시영·공진원·金毅漢 등이었다.565) 이들은 김구·조완구·박찬익 등의 보수파와 홍진·조소앙 등의 진보파로 구성되었는데, 후자는 전자에 비해 민족혁명당 등 다른 정당·단체와의 합작문제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다.566)
3당 해체선언은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 우파진영 정당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는 정신 아래, “3·1운동의 생명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당임을 성명함”567)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당의 이념도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진영에서 널리 수용되어 있던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黨義에 삼균주의 이론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혁명적 수단으로 일본침략세력을 박멸하고 국토·주권을 완전히 광복하며 정치·경제·교육의 평등한 기초 위에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안으로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 世界一家의 노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 골자였다. 당강의 주요내용은 완전한 광복을 통한 대한민국의 건설, 보통 선거제 실시를 통한 정치적 균등,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통한 경제적 균등, 의무교육을 통한 교육적 균등, 그리고 광복군 편성과 의무병역 실시 등이었다. 또한 당책의 주요내용은 민족의 혁명의식 환기, 국내외의 민족혁명역량 집중, 광복군 편성, 대중적 반항과 무장적 전투의 확대, 임시정부의 옹호, 중국의 항일동맹군으로서의 구체적 활동 등이었다.568)
3당이 통합한 1940년의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그 자체였다. 당의 간부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정책이 곧 정부의 그것이었다. 따라서 당의 구체적인 활동이 임시정부의 운영과 한국광복군의 결성으로 나타났고, 그제서야 당·정·군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민족전선이 이 보다 2년 앞선 1938년 10월에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이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장교양성과 무장대의 편성 및 유격대의 조직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하고 陝西省 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569) 이어서 1940년 4월에 3당통합을 위한 대표회의에서 중국영토 안에서 한국광복군이 성립될 수 있도록 중국정부에 승인을 요구하는 안을 결의했다.570) 다음 달인 5월에 장개석의 승인으로 준비는 진행되어 9월 17일에 重慶에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를 개최했다.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군을 한국독립당의 ‘당군’이 아니라 한국의 ‘국군’임을 강조했다.571) 그리고 이들은 중국 각지에 있는 모든 한국인 무장부대를 규합하여 통일적인 지휘 아래 공동으로 항일의 행렬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러한 통일의 목표대상은 西安에 있던 나월환의 한국청년전지복무대만이 아니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는 1940년 말에 이미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나, 후자의 경우는 그 성립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되고 동시에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무장세력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오히려 광복군과 대결하는 구도를 보였다.572)
광복군을 조직한 한국독립당은 다시 1941년에 들어 발전단계와<건국강령>을 마련하였다. 5월에 제1차 전당대표회의를 통해 復國·建國·治國의 발전단계와 정책을 제시한 뒤, 이어서 정당의 차원에서 논의되고 정리되었던 독립운동에 대한 이론을 정부의 차원에서 다시 검토하고 수용하여 1941년 11월에<건국강령>으로 발표했다. 이러한 과정은 당과 정부의 기능이 제자리를 찾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573)
563) | 三均學會,≪素昻先生全集≫(횃불사, 1979), 1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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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67∼668쪽. |
565)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70쪽. 金 九,≪白凡逸志≫(光明出版社, 1947), 345쪽. |
566)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66쪽. |
567)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68쪽. |
568)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405∼406쪽. |
56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 884쪽. |
570)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740쪽. |
571) | 韓詩俊,≪韓國光復軍≫(일조각, 1993), 88쪽. |
572) | 如松,<論朝鮮義勇隊在革命運動中的地位>(≪朝鮮義勇隊≫37기-2주년특집호;국가보훈처,≪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8), 444쪽. |
573)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1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