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민족혁명당
1939년 초부터 몰아친 제 정당·단체의 단일당 조직을 위한 노력이 실패하자 민족혁명당은 상당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장개석의 적극적인 요구가 수용되면서 추진되던 진선협회가 주저앉음에 따라 민족전선이 와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광복진선이 우파만의 3당통합을 이룬 것과는 정반대로 민족전선을 형성하던 4당 가운데 2개 당이 떨어져 나가버린 것이다. 이것은 곧 김원봉의 민족전선 장악력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족혁명당이 비록 진선협회에서 탈퇴했지만 그 이전만큼 민족전선의 구성단체들에게 지도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한 구체적인 증상이 그 해 말부터 다음 해인 1940년 말까지 조선의용대의 분열인데, 3분의 2가 넘는 병력이 화북지역으로 이동해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의용대의 분열이란 결국 김원봉의 민족혁명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괴리를 의미한다.574) 조선의용대는 1939년 말에 세 개의 지대로 개편되었다. 이 가운데 申岳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원으로 이루어진 제1지대 50명이 1940년 3월에 洛陽으로 북상한 것을 비롯하여 그 해 말에 2지대도 북상하였으며, 민족혁명당 본부의 제3지대도 1941년 3월 상순에 낙양에 도착하였다. 중경에서 파견된 제3지대는 앞서 이동한 부대들을 김원봉이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보낸 핵심부하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3월 말에서 4월 사이에 황하를 건너 간 조선의용대 병력은 결국 중국국민당 작전지역을 뚫고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575) 그러므로 김원봉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의용대는 사실상 주력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한편 최창익과 달리 민족혁명당에 남아 있던 한빈은 김원봉으로부터 무기정권 처분을 받자 10여 명을 이끌고 1940년 여름에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 그는 김성숙·박건웅·李貞浩와 함께 그 해 말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합류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였다.576) 이로써 민족혁명당은 크게 약화되었고,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