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임시정부로의 합류
(1) 한국독립당
중경시대 독립운동정당은 1942년 10월에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1940년 통합 한국독립당이 성립되면서 임시정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했지만, 이 때부터는 강력한 야당을 대응세력으로 두는 여당이 된 것이다. 한국독립당이 출범한 1940년 5월부터 1943년 5월까지 3년 동안은 김구가 집행위원장을 맡는 소위 ‘김구체제’였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조소앙·홍진 등의 진보적인 인물이 대두하게 되었는데, 1943년 5월 8일에 개최된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조소앙이 중앙집행위원장이 됨으로써 제2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조소앙이 위원장을 맡기는 했으나 김구가 계속하여 財政權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의 세력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1945년 7월 제4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위원장에 김구, 부위원장에 조소앙을 선출하여 소위 ‘김구·조소앙체제’를 이루었다.
당·정 관계도 민족혁명당이 합류하면서 당연히 크게 바뀌었다.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1943년 1월 제14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무력은 광복군에, 정치·외교는 정부로 집중하여 독립운동을 일원화한다고 정리되었다.577) 민족혁명당의 합류 이전에는 한국독립당의 간부가 임시정부의 직책들을 겸직하여, 당은 바로 정부 그 자체였지만, 이제는 그 성격이 바뀌어 야당에 대응되는 개념의 여당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578)
이 과정에서 한국독립당은 분열의 양상도 보였다. 그것은 국무위원 배분문제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1943년 10월에 유동열이 이탈하여 조선민족혁명통일동맹을 조직했고, 이어서 1944년에 들면서 의정원 의장 홍진과 부의장 최동오가 중간에서 조정역할을 맡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을 결성하는 등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79) 한국독립당의 이념은 앞에서 본 것처럼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삼았다. 그것은 대내적으로 민족내부에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모순을 제거하고 대외적으로 세계인류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을 실현함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화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580)
한국독립당의 구성원 가운데 박찬익·조완구 등의 보수파는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하는 자세를 보였다. 비록 당강에서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를 선언하여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나타내기는 했어도, 이들의 기본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무산계급에 의한 계급혁명을 반대한 논거는 식민지 상태에 있는 국가에게 민족모순이 계급모순에 우선한다는 것, 국가와 민족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혁명이 이를 부인함으로써 민족혁명을 파괴한다는 것, 무산계급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속한 국가와 민족의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이 다르다는 것 등이었다. 따라서 민족연합을 결성하는데 있어서도 이들 세력을 배제하고 민족혁명을 우선시하는 인사들만의 연합을 주장했던 것이다.
한국독립당의 조직변천상의 특징은 상층조직만으로 유지되었다는 것, 한국 교민만을 조직기반으로 하고 대중조직을 지향하지 못했던 것, 다른 정당·단체와의 전선연합에서 극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 등이었다.581) 아울러 한국독립당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임시정부의 바탕이 되고 이를 강화하여 장차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위한 정당과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는 기초를 마련한 데 있다.
577) |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3(1973), 4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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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 | 이러한 모습은 국무위원이나 의정원 의원의 수치를 통해 나타났다. 그 예로 민족혁명당 참가 직후의 국무위원은 11명인데,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이 각각 9석과 2석을 차지했고 의정원 의원수도 57석 가운데 25석과 13석을 각각 차지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胡春惠, 앞의 책, 133쪽). |
579) | 유동열 등의 탈당자 17명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당을 위하여 당을 需要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익을 위하여 당을 수요하는 것이며, 통일을 위하여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익을 위하여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161쪽). 유동열은 당을 이탈하여 조직을 선언했던 조선민족혁명통일동맹을 취소하고 신한민주당을 조직했다(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188∼189쪽). |
580)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141∼142쪽. |
581) | 노경채, 앞의 책(1996), 23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