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민족혁명당
민족혁명당은 1939년 말에서 1940년 말까지 한빈·이정호 등이 탈당하고 조선의용대가 화북지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매우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정부가 1941년을 전후하여 여러 단체에 대한 지원정책을 바꾸어 임시정부만을 유일한 지원대상으로 함에 따라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때문에 민족혁명당은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틀 뒤인 1941년 12월 10일에 개최된 제6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참여를 결의하고 한국독립당과의 통일협상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대회선언에서 “종래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不關主義를 취해 왔으나 내외의 정세가 변하여 지난 5월 제5기 제7차 중앙의회에서 종래의 불관주의를 포기하고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582)
1942년 10월 25일에 개최된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 부족한 23명의 의원을 보선하는 과정에 민족혁명당의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다.583) 그리고 9명이었던 국무위원수를 11명으로 늘렸는데, 민족혁명당의 金奎植과 張建相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584) 이어서 1943년 10월에 열린 제35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48명 가운데 24석을 차지한 한국독립당을 이어, 민족혁명당이 12석을, 그리고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다른 세력이 나머지를 차지했다.585) 민족혁명당은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단일당을 향한 통일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통일의 조건에 있어 심한 차이를 보이자,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던 세력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43년 2월에 있은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서 민족혁명당과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조선민족혁명당해외전권위원회·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4당통일을 결의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임시정부의 확대·강화를 비롯한 지부 확충 등의 중요사업을 결정했다.586) 이와 아울러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서 한국독립당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고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1945년 6월 11일 한국독립당에 임시정부 재정의 공개, 비밀외교 정지, 미국 의존 금지, 광복군 인사의 양당 사전 협의, 광복군 제반사항에 대한 총사령·참모장의 사전 협의 등을 요구했다.587)
민족혁명당의 조직은 역시 한국독립당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제였다. 전당대표대회가 최고의 권력기구였고, 그 아래에 중앙집행위원회가 있고, 또 그 아래에 각부가 있었다. 조직과 간부를 보면 1944년의 경우, 주석에 김규식, 총서기 김원봉, 비서처 주임 申基彦, 조직부장 金仁哲, 선전부장 孫斗煥, 재정부장 成玄園, 통계부장 申榮三, 미주 총지부장 金剛, 미주지부 총서기 李慶善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한국독립당의 경우와 다른 점은 주석이 큰 힘을 갖지 못하는 반면에 모든 권한과 대외사무를 총서기가 담당했던 점이었다.588)
민족혁명당은 비교적 공산주의에 접근한 이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의 공산당계통과 행동을 같이 하였고 투쟁강령에서도 반제국주의, 봉건잔여세력의 타도, 토지혁명, 노동시간 단축 등을 강조하고 한국독립당이 취한 자유경제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민족혁명당은 1942년 12월 제6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정강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자주독립의 민주공화국 수립, 국민헌법 제정과 보통선거제 실시, 토지혁명 단행, 부녀권리 보장,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보험, 반파시스트 조선인 기업가 보호육성, 기본권 보장 등이었다.589) 이를 통해 민족혁명당이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소자산 계급을 기초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582)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21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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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 | 重慶≪大公報≫, 民國 31년(1942) 10월 26일(趙中孚·張存武·胡春惠編,≪近代中韓關係史資料彙編≫4, 臺北:國史館, 1987), 462쪽. |
584) | 胡春惠, 앞의 책, 120쪽. |
585) | 胡春惠, 위의 책, 122쪽. |
58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資料集≫7, 208쪽. |
587)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 83쪽. 이 요구 가운데 미국에 附庸하지 말라는 것은 국내로의 침투를 위해 서안에 있던 미국공군으로부터 한국광복군이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이었다. 민족혁명당이 전쟁 진행상황을 알지 못한데서 나온 주장으로 보인다. |
588) | 胡春惠, 앞의 책, 209쪽. |
589) | 秋憲樹,≪資料 韓國獨立運動≫2, 209∼21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