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연원은 1929년 10월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에 이른다. 유호동맹원 가운데 일부가 민족혁명당으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중국공산당원으로서 활동하였다.590) 민족혁명당에 가담했던 세력이 1936년에 이를 이탈하여 김성숙과 박건웅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다. 김성숙 등은 김원봉의 독주로 이루어지는 민족혁명당의 운영에 불만을 갖고 이를 이탈하여 동맹을 조직했는데, 그 구성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인물들로 이루어졌다.591)
이 동맹은 1937년에 조직된 좌파의 연합조직인 민족전선에 합류했다. 이어서 이 동맹은 1939년 9월 7당통일회의에서 조직방법론의 차이를 내세워 조선청년전위동맹과 함께 이탈하였고, 1940년 말에는 한빈과 이정호 그리고 조선청년전위동맹과 합류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다. 그 뒤 한빈과 조선청년전위동맹원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1·2지대가 화북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자, 1941년 12월 1일에 임시정부의 지지를 선언하고 이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김성숙은 1942년에 내무차장, 1943년에 국무위원이 되었다. 당시의 주요구성원은 김성숙을 비롯하여 박건웅, 신익희의 사위였던 金載浩(일명 胡建)와 그의 아내 申貞琓 등이었다.592)
이 동맹의 성립이 갖고 있는 의의는 중국국민당 지구 내에 있던 공산주의자를 조직적으로 통일했던 점과 국제성보다는 민족혁명을 우선하여 임시정부를 강화시켰던 점이다. 한편 화북지역의 조선독립동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던 데에 그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