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딸린 비밀전문과 서북5도행정국
북한지역에 주둔한 소련극동군 제25군은 이상의 일반적 방침 이상으로는 구체적인 방침을 하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한 달을 보냈다. 드디어 9월 20일, 소련군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스딸린(Сталин И.В.)은 북한지역 주둔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을 하달하였다. 그 내용은 최근 전문이 공개되었다.
<북한에서 소련군 부대와 지방정권기관 및 주민과의 상호관계에 대해 소련 극동사령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와 제25군에 내린 소련군 최고사령관의 지시>
1. 북한 영토 안에 소비에트 및 소비에트 권력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지 말고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 모든 反日 민주주의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권력을 수립하는 데 협력할 것.
3. 붉은 군대가 점령한 한국 땅에서 反日 민주주의 정당·단체 결성을 방해하지 말고, 그들의 사업을 도와줄 것.
4. 지방 주민에게 아래와 같이 홍보할 것.
가) 붉은 군대의 북한 진주는 일본 강점자를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며 한국 영토를 탐내거나 소비에트식 질서를 부식시키자는 것이 아님.
나) 북한 인민의 개인적, 사회적 소유는 소련군 당국의 보호를 받음.
5. 지방주민들에게 자신의 평화적인 사업을 계속하도록 호소하며 그리하여 공업, 상업, 교통 및 기타 기업들의 정상 가동을 도모하고 소련군 당국의 지시와 요구에 응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협력해 주도록 알릴 것.
6.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장병들에게 군기를 엄격히 지키고 주민을 괴롭히지 말며 행동을 잘 하도록 訓示할 것. 종교 예식 수행과 행사 등을 방해하지 말고 사찰과 기타 종교시설에 손대지 말 것.
7.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
(러시아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ЦАМОРФ), 문서군(Фонд) 148, 목록(описЬ) 3763, 문서철(дело) 111, 92∼93쪽).
스딸린 비밀전문의 요점은 소련에 우호적인 권력을 북한지역에 수립하도록 하기 위해, 반일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를 육성 지원하며, 그 권력의 형태는 소비에트가 아닌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소련군이 단지 일본군 무장해제만을 목적으로 하여 주둔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소련의 국가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둔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비밀전문은 권력수립의 문제에서 문장만으로는 그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북한지역에 친소적인 권력수립을 지원한다면, 그것은 연합국간 합의사항인 한반도 신탁통치 방침과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인가. 한반도 전역의 신탁통치 방침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미리 전제하고 분단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의도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를 연합국간에 합의하여 처리하기 전에 일부 지역에 우선적으로 친소적인 권력을 수립하여 그를 바탕으로 하여 신탁통치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자 한 임시 권력·지역 권력수립 방안이었을까.
9월 20일은 런던에서 미·소·영 3개국의 제1차 외상회의(9월 11일∼10월 2일)가 열리고 있던 시점이다. 러시아 외교문서에 의하면, 당시 소련은 한반도의 4개국 신탁통치에 참여하며 그와 더불어 釜山 등 남한지역의 항구들을 소련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고자 하였다.715) 당시 분단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구상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련은 한반도를 국제적으로 관리한다는 미국측의 일관된 주장에 일단 보조를 같이하되, 향후 수립될 한국정부에서 소련의 안보상의 이해관계가 최대한 보장되게 하기 위해 북한지역에서 먼저 자신의 지지기반을 임시적으로 창출하려 한 것이 이 훈령의 의도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후 소련군의 북한주둔정책은 이 원칙에 입각하여 진행된다. 소련은 한편으로는 연합국간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해 나가되, 다른 한편으로 북한지역에서는 친소적인 임시권력 수립을 현실화해 갔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그 권력을 전제로 해서 남한지역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들과 연립하여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연합국들이 후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분단정부 수립 방침은 적어도 1945년 시점에는 세워져 있지 않았다.
소련주둔군은 스딸린 비밀전문에 입각하여 정책을 전개하였다. 우선 지역 인민위원회들을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0월 8∼10일 사이에 평양에서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개최된다.716) 이 회의에는 각 도인민위원회 대표 111명, 평양의 각계 대표 39명, 그리고 소련군사령부 대표 20명, 총 170명이 참가하였다. 각 도인민위원회 대표 111명 중 51명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717)
치스짜코프의 연설 후, 5개 분과별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의제는 ①농산물 확충과 식량 성출 문제, ②군수공장의 민수공장으로의 전환문제, ③금융재정 문제, ④지방기구의 정비·통일문제였다.718) 이 회의에서는 여러 의제 중 하나로 “광범한 모든 반일 민주주의 정당과 조직들의 블록에 기초하여 민주적인 권력을 창출하는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45년 11월에 전체 里民 대회에서 이장을 선출하며 농촌과 촌락에서 선출된 선거인들의 면대회에서 7∼8명으로 구성된 면인민위원회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또한 “시·군·도임시인민위원회들은 다양한 반일 민주주의 조직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현재대로 놓아두기로” 하였다. 당시 시위원회는 27명까지, 郡임시인민위원회는 17∼19명, 道임시인민위원회는 45∼47명까지 구성719)되어 있었는데, 임시인민위원회들의 조직 구성을 보면, 각 도인민위원회에는 위원장·내무국장·보안국장·공업국장·재정국장·상업국장·농업국장이 두어졌으며, 군임시인민위원회들도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었다.720)
이 회의에서는 인민위원회 선거들을 준비하고 실행하기 위해 선거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하며, 각 도임시인민위원회들에게 선거를 지도할 의무를 부여하였다. 한국의 국가헌법이 작성될 때까지 인민권력의 임시기관들에 대한 선거는 보통·평등선거권에 기초하여 비밀투표로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성·재산상태·신앙·교육·거주·민족성에 구별없이 모든 20세 이상의 시민에게 주어졌다. 일본인들은 선거권을 잃었다. 입후보권은 각 도임시인민위원회와 소련군사령부에게 강령과 지도부의 구성원을 등록한 모든 반일 민주정당·단체들에게 주어졌다.721)
소련군은 주둔 직후에는 자생적으로 건설되고 있던 인민위원회에 대하여 ‘위’로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동일 비율로 조절토록 유도하는 방식을 취하였다면,722) 10월 단계부터는 ‘아래’로부터, 즉 촌락과 면 단위에서부터 선거를 통해 권력을 건설해 가는 방식을 유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상의 선거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그 대신 각 도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총괄할 북조선행정국이 1945년 11월에 설치되었다. 소련주둔군사령부는 “경제생활을 급속히 整齊시키며 경제생활의 통일적 지도와 관리사업의 만전을 기하며 民政에 관한 협의”를 위하여 소재지를 평양으로 한 北朝鮮諸行政局을 조직하고 국장들을 임명하였다.
공업국장 鄭準澤, 재무국장 李鳳洙, 교통국장 韓熙珍, 교육국장 張鍾植, 농림국장 李舜根, 보건국장 尹基寧, 상업국장 韓東燦, 사법국장 趙松波, 체신국장 趙永烈, 보안국장 崔庸健(≪正路≫, 1945년 11월 25일).
그리고 소련군사령관의 檢事감독에 관한 고문관으로 韓洛奎, 재판에 관한 고문관으로 梁台源이 임명되었다.723) 북조선행정국의 사업은 “신조선 건설, 국내의 경제생활 개선, 민족문화 발전 및 인민의 생활 형편을 향상시킴에 방향”을 두었다.724)
715) |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로 미국과 소련간에 의견이 대립하게 되는 시점은 9월 24일 이후이다. 그 이전에 미국과 소련이 동북아시아 문제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9월 20일의 시점은 미·소간에 국제적인 협조관계가 손상되지 않은 시점이다. 런던외상회담에 대해서는 김성보, 앞의 글, 62∼69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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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 국사편찬위원회 편,<해방 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일지>(≪북한관계사료집≫7, 국사편찬위원회, 1989), 576쪽. |
717) | Лебедев Н. Г.(레베데프), “Заря свободы над Кореей(한국에서의 자유의 여명)”, Во имя дружбы с народом Кореи-Воспоминания и статы(한국 인민과 우호를 위하여-회상기와 논문), Наука, Москва, 1965, 38쪽. <해방 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 일지>(≪북한관계사료집≫7권), 576쪽에는 각도 대표 75명이 참석하였다고 되어 있다. |
718) | <해방 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 일지>(≪북한관계사료집≫7), 576쪽. |
719) | 면위원회는 7∼8명으로 구성되었다. 각급 인민위원회 구성원들은 모두 1만 명이 넘었다. 인민위원회들에는 주민 각층이 대표되었다. 노동자·농민·인텔리겐차·수공업자·상인·기업가·종교인·지주. 명확한 친일적 요소들은 참여하지 못하였다(러시아현대사자료보존 및 연구센터(РЦХИДНИ), 문서군 17, 목록 128, 문서철 1119, 160쪽). |
720) | 러시아현대사문서보존 및 연구센터, 문서군 17, 목록 128, 문서철 94, 15쪽. 각 도인민위원회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황해도인민위원회는 내무국·교육국·鑛工局·農商局·재정국·경찰국·사법국·교통통신국·수송국(плавнойотдел)·입법국의 10개 국을 운영하였다.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는 입법국과 수송국을 제외한 8개 국만 설치하였다. Щетинин Б. В.(쉐찌닌), “Власть-Народу(권력-인민에게)”, Во имя дружбы с народом Кореи-Воспоминания и статы(한국 인민과 우호를 위하여-회상기와 논문), 122쪽. |
721) | 러시아현대사문서보존 및 연구센터, 문서군 17, 목록 128, 문서철 94, 15쪽. 레베데프에 의하면,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리장선거는 11월 1∼15일 사이에, 면인민위원장선거는 11월 15∼30일 사이에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Лебедев Н. Г.(레베데프), 앞의 글, 39쪽). |
722) | 김용복, 앞의 글, 206∼214쪽 참조. |
723) | ≪正路≫, 1945년 11월 25일. |
724) | ≪正路≫, 1945년 12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