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1. 우리 나라의 발달(4) 조선 시대의 생활

〈근대 사회로의 발전〉

이러한 혼란을 없애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아 보려고 한 이가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당파에 관계 없이 인재를 뽑아 쓰고, 많은 폐단이 있었던 서원을 철폐하고, 나쁜 습관과 의복을 고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밖으로부터 서양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여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누르는 한편, 나라의 문을 굳게 닫는 쇄국 정책을 썼으므로, 서양의 새로운 여러 문화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배가 와서 서로 통상을 하자고 하였으나, 대원군은 이들을 무력으로 쫓아 버렸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통상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이 재빨리 수호 조약을 요청해 와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게 되니, 비로소 우리 나라도 밖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1876). 이어서 미국, 영국, 도이칠란트, 러시아 등 서양의 여러 나라와 차례로 조약을 맺어, 서양의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에도 서양의 새 문명이 들어와 많은 개화를 하였다. 그러나, 개화를 반대하는 보수파의 임오군란과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으로 개화파와 보수파의 싸움이 치열하여 나라의 정세는 더욱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서 일본과 러시아 등의 외국 세력이 들어와 우리 나라를 엿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조선에 그들의 상품을 팔아 시장으로 만들고, 또 정치적으로도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안으로 정치적 혼란과, 밖으로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투로 국민들의 반감이 커 갔다. 이러한 국민들의 감정은 1894년에 폭발되었으니 이것이 동학 혁명이다. 동학 혁명은 밖으로는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되었지만, 한편 안으로는 갑오경장을 일으켜 정치를 개혁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 갑오경장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에도 비로소 근대적인 여러 제도가 마련되었다.

동학 혁명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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