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1. 우리 민족과 국가의 발전(4) 우리 민족의 해외 진출

[3] 조선 통신사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알아보자.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그들이 가져온 구리를 식량, 옷감과 교환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다음에는 그들과의 교류를 끊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에서는 새로운 지배자가 나왔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다시 예전처럼 교섭을 허용해 주고, 전처럼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사절단을 보내었는데, 이를 조선 통신사라 한다.

조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처음에는 왜란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두 나라 사이의 믿음을 두텁게 하여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통신사 행렬도 ①   
통신사란 신뢰로 서로 통하는 사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통신사 일행은 가는 목적에 따라 300명에서 500명 정도로 그 수를 조절하였다.

일본은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 대마도(쓰시마 섬)의 영주를 조선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고,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희망하였다. 이 때, 조선 조정은 일본이 또다시 욕심을 부려 조선을 공격해 올지 모르므로, 일본 사절단이 서울까지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부산에서 맞았다.

일본은 우리 나라 통신사들을 매우 정중히 맞이하였다. 일본 사절단은 왜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서울에서 통신사 일행이 내려가면 이들을 대마도까지 안내하였다. 대마도로부터 오늘날 도쿄까지의 안내는 대마도 영주가 맡아 하였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②   

통신사 행렬도를 보고, 일본 사람들이 조선 통신사 일행을 대우한 모습을 이야기해 보자.

일본 지식인들은 우리 나라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몰려들어, 학문과 기술, 예술 등 우리 나라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절과 일본 학자들 간에는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의 유학은 그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고,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③   

그들은 통신사 일행이 건네 준 한시, 그림, 글씨, 책, 도자기 등을 가보로 삼는 등 조선 통신사 일행과의 접촉을 더할 수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다음은 통신사 일기 중 한 대목으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 신시(오후 4시)에 항구에 들어서니 배를 끌고 갈 수많은 왜선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청색 비단으로 만든 깃발에 정⋅부⋅종 세 글자를 써서 각각 표지를 삼았다. 우리 측 사신이 모두 무사히 도착하자, 왜인들은 앞다투어 축하하였다. …(중략)… 각 사신들을 2~3명의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니 온갖 것이 질서 정연하였다.

○ 왜인들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와서 글씨를 받아 갔다. 간혹 초서를 쓸 때 필체가 시원스럽게 내려가면 곁에서 보고 있던 왜인들이 모두 감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을 맞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역할극으로 꾸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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