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우리 역사의 시작과 부족 국가 시대

1. 우리 나라의 원시 사회

우리 역사의 무대

우리 민족은 대한 반도뿐만 아니라 광막한 만주 일대까지도, 오랫동안에 걸쳐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 삼아 왔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한 반도로서 대륙의 정치적,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우리 문화는, 남으로 일본 열도에까지 선진 고대 문명을 전달하는 구실을 하여 왔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각종 자원이 비교적 풍부하여 자급 자족의 생활을 하여 왔을 뿐 아니라, 또 인간이 활동하기 가장 알맞은 온대 계절풍 지대에 속하여 있어 농업 생활에 큰 도움을 받아 왔다. 또,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강산, 변화 있는 사철의 자연 환경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여 민족 예술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우리 민족의 유래

우리 민족은 대한족으로서,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하나의 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인종학상의 위치는 알타이 어족의 한 계통으로서, 원주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들은 대륙 내부로부터 남동으로 이동하여, 만주족의 조상인 숙신족을 만주 북동부로 제압하면서 파상적으로 벌어져 나와, 서부와 반도 각지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뒤, 자연 환경의 차이에 따라 생활 양식이 달라졌으나, 고대 문화에 북방적 요소가 지극히 강하고 남방적 요소가 그리 강하지 않은 점이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석기 시대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예는 극히 적지만1), 중국이나 만주 및 일본 등지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음을 보아,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인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의 하나가 토기이다. 이 토기를 보면, 여러 계통의 문화를 가진 종족들이 한반도로 이주해 와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랜 즐문 토기(빗살 무늬 토기)는 흔히 스칸디나비아 반도로부터 시베리아 동쪽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토기로서, 한반도에서도 각지의 하천 유역이나 해안 지대에서 출토되었다. 이에 반하여, 반도 전역의 구릉에서 발견된 무문 토기(무늬 없는 두꺼운 토기)는 농경 문화권에 속하는 화북, 만주와 연관된다. 중국 본토와 연관되리라고 보이는 또 다른 계통의 단도 마연 토기(붉은 빛깔을 칠한 토기)도 무문 토기와 섞여 나온다.

즐문 토기   
무문 토기   
단도 마연 토기   

이러한 토기에 대한 연구로, 처음 대륙 북방계의 즐문 토기인들이 하천이나 해안을 따라 들어와 어로, 수렵에 종사하였으나, 무문 토기인들이 이들을 구축하면서 농경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또 단도 마연 토기인들이 이에 섞여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원시 시대의 유적⋅유물

원시 시대의 유적으로는 주거지와 패총(조개무지)이 있는데, 전자는 각지에서 발견된 수혈 주거지이며, 후자는 김해, 양산, 사천, 몽금포, 나남, 웅기 등 주로 해안 지대에서 발견된 패총이다. 또, 분묘인 고인돌(지석묘)이 있는데, 이는 후기 원시 사회 구성을 해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물로는 토기, 석기, 골각기 등이 있고, 석기로는 석부(돌도끼), 석도, 석검(돌칼), 석촉(돌화살촉) 등이 있는데,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한편, 방추차나 관옥, 또는 뼈바늘 등의 골각기도 출토된다.

신석기 시대의 석기   

원시 사회의 발달

씨족은 신석기 시대의 기본적인 사회 단위였다. 아직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여 개인적인 활동에 의한 생활을 지탱하여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씨족 사회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 또, 씨족 사회는 자급 자족하는 독립적 사회 단위였으므로, 자연 폐쇄적인 성격을 띠어 다른 씨족 단체와의 교섭은 거의 없었다. 차차 인구의 증가, 경제 활동의 진전에 따라 씨족 사회의 확대 과정이 생겨나자, 동계의 씨족 사회를 연합하는 부족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부족 사회도 공동 조상을 받드는 혈연적인 사회였으므로, 차차 복잡성을 띰에 따라 부족의 대표자인 부족장의 통솔력의 강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고인돌은 바로 이러한 통제력, 집권력의 강화를 증명해 주는 유물이다.

원시 사회의 생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처음 한반도에는 하천과 해안 지대에서 어로를 중요 생산 수단으로 삼던 즐문 토기인과, 구릉 지대에서 사냥과 원시 농경 생활을 하던 무문 토기인의 두 가지 생활 양식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정착 취락 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차차 농경 생활이 일반화되었다.

유물 가운데 방추차, 뼈바늘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짐승의 가죽 같은 것으로 몸을 가렸으나 나중에는 천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또, 조개로 만든 팔찌, 옥가락지, 관옥 등의 장신구를 이용할 줄도 알았다. 한편, 온돌과 화로의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생식 단계를 벗어나 음식물을 불에 익혀 먹는 방법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또, 맷돌의 구실을 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는 석기, 시루라고 할 수 있는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음은 흥미 있는 일이다.

선사 시대의 온돌터   
함경 북도 웅기
1) 구석기 유물은 1940년 두만강 유역의 동관진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그 뒤, 1964년 금강 연안 포함층에서도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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