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고대 사회2. 부족 국가의 성장과 그 문화

(2) 철기 문화와 부족 국가의 성장

부족 국가의 성격

철기 문화가 급속히 보급되자,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씨족 공동체 관계는 거의 해체되고 친족 공동체가 성립되는 변동이 일어났다. 친족 공동체의 장 중에서 가장 강한 자가 부족장이 되어, 재래의 부족 단위의 집단을 보다 강력히 지배하는 부족 국가들을 성립시켰다.

그리하여, 고조선이 망한 이후 철기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부족 국가들이 건설되었으니, 북쪽에는 부여, 고구려, 동예 및 옥저가 성립되었으며, 남쪽에는 삼한의 많은 나라가 일어났다.

민족 이동로와 부족 국가   

이 시대에 와서는 철제 농기구에 의한 농경 방법이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 새로운 경제 기반 위에서 기마 민족 문화의 영향으로 목축이 성하였으며, 한편으로 어업이 발달하면서 양산, 김해, 웅천 등지에 조개무지를 남겼다. 이에 따라, 부족 상호간의 교역 관계가 활발해짐으로써 여러 계통의 문화 융합이 촉진되어, 장차 고대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부여

만주의 눙안, 창춘 지방에 자리잡은 부여는 몇 개의 부족으로 형성된 총 8만 호에 이르는 큰 부족 연맹이었다. 고조선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이루어진 집단으로서, 고구려나 백제도 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부여는 반농 반목의 경제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그 오랜 역사에 비해 큰 발전을 보지 못한 나라였다.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여 중국에 수출하였다.

부여 사회의 정치 제도에는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및 대사자와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그리고, 대가들은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중앙과 합하여 5부제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부여가 5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몇 개의 부족이 연맹하여 성립된 부족 연맹체에서는, 각 부족장들이 각기 따로 관리를 두고 자기 지역을 다스렸다. 그리하여, 그 중의 강한 하나가 연맹의 대표로서 영도 세력을 가지게 되나, 다른 부족들과 그 지방을 직접 지배할 수 있는 고대 왕권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족 연맹장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었고, 왕(연맹장)이 죽으면 사람을 백여 명씩이나 순장하였다. 달력은 은력(殷曆)을 사용하였으며, 정월(현재의 12월에 해당)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고구려

기마 민족의 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였던 고구려는, 원래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뒤에 통구에 옮겨 오면서 강대해졌다. 통구 지방은 중국의 동방 침입의 요로로서, 이 지방을 거쳐 낙랑군과 임둔군에 도달하였는데, 고구려의 대두는 이들의 교통로를 절단하는 결과가 되었다.

기사도   
쌍영총 연도 벽화로서, 무사와 말의 율동감이 잘 조화되었으며, 고구려 무사의 복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만주 통구 소재.

2세기 초 태조왕 때에는 고대 국가의 기반이 성립되어, 지금의 싱징 부근으로 쫓겨 나간 현도군을 다시 푸순 방면으로 몰아 냈고, 동으로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였으며, 낙랑군에 자주 쳐들어갔다. 3세기경에는 총 홋수 3만 호에, 지배 계급의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이 정치, 군사의 중추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일반 민중과 노비는 농경과 목축 등 생산에 종사하였다. 부여와 같이 큰 창고는 없었으나,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가 있어 여기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고구려의 관리로는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 사자, 조의, 선인 등이 있었으며, 각 부족장들도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들을 둘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 풍속에는 데릴사위 제도가 있었으며, 해마다 추수 뒤인 10월에는 시조신을 모시는 동맹이라는 제전을 열어 큰 잔치를 하였다. 이 제전은 부족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그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옥저와 동예

옥저는 지금의 함흥 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작은 집단으로서, 각 부락에는 작은 족장들이 있어서 자기의 부락을 다스렸는데, 이들을 통솔할 수 있는 보다 큰 정치 세력은 성립되지 못하였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로, 언어는 대개 고구려와 같았고, 그 풍속은 지방적인 차이가 있었다. 혼인은 고구려의 데릴사위 제도와는 반대로 민며느리 제도가 행해졌다. 그리고, 이들은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 안에 넣었다.

옥저는 그 지역이 해안 지대였으므로,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었다. 초기의 고구려는 해안선을 가지지 못한 내륙 국가였으나, 옥저를 점령하면서부터 소금, 어물 등 해산물을 공납으로 받아 가게 되었다.

한편, 동예는 영흥, 덕원, 안변 등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한 조건을 가졌으므로 농경, 어로, 수렵 등으로 경제 생활이 풍부하였고, 특히 산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고 삼베도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지방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果下馬, 조랑말), 반어피 등이 있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이들은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 사회는 족외혼율이 엄하고, 각 씨족마다 생활권이 정해져 있어서 다른 씨족의 경계 안에서는 수렵, 어로, 경작을 못 하였다. 동예는, 문화면에서는 고대 국가 전단계까지 발달하였으나, 씨족 사회의 전통은 그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각 족장들은 한의 군현에 복속하였다가 얼마 후에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삼한

고조선의 준왕이 남으로 망명할 무렵, 북방에서 함께 내려온 이주민들은 한강 이남 전 지역에서 토착민과 연합하여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이 중에서 우리 나라 남부의 서쪽에 위치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고, 그 중의 하나인 목지국이 남방의 영도 세력이 되었다. 마한에는 많은 부족 국가가 있었고,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과 진한 남쪽에 있는 변한 지역에도 여러 부족 국가가 있었다.

당시 일반 민간인의 가옥은 손쉽게 지을 수 있는 움집이나 귀틀집이었으나, 차차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한 오늘날의 초가집과 비슷한 집이 세워졌다.

가옥 모양의 토기   
초가집 양식을 보여 주는 토기로, 주로 한반도 이남에서 발견된다.

농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농경 기술이 들어와서, 밭갈이에 가축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부족이 생겼고, 수전 경작을 위하여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상주의 공검지, 의성의 대제지 등 많은 저수지가 축조되었다. 삼한 사회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의 수릿날과, 가을 곡식을 거두는 10월에는 계절제를 열어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계절제는 오늘날까지 5월 단오와 10월 상달 고사의 풍속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기술로 농지를 개척하여 소유하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물의 관리권을 가지게 된 신지, 견지라고 불리는 대족장은 물론, 그보다 작은 읍차, 부례라는 소족장들의 지배력도 크게 강화되었다.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커지자, 그 전부터 있던 제사장인 천군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제정이 분리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족장들의 무덤인 적석총이나 석관묘는 내부의 시설과 함께 그 봉토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고, 커다란 독에 시체를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의 매장 방식도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소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죄인이 도망하여 이 소도 지역에 들어가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 제도는 그 당시 신⋅구 문화의 충돌과, 이에 따라 일어나는 사회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당시 변한은 철의 생산이 많았는데, 마산의 성산동에서는 야철지(冶鐵址)가 발견되어 이미 기원전부터 제철이 크게 성하였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철괴를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철은 국내 수요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낙랑, 대방과 일본 지역에도 수출되었다.

삼한 시대의 야철지   
철산지로 유명한 변한 지방에서는 멀리 낙랑, 대방, 일본에까지 철을 공급하였다. 경남 마산시 성산동에서 발견.

이와 같은 철기 문화의 급속한 보급은 삼한 사회에 변동을 가져왔다. 즉, 지금의 직산 지역에서는 목지국의 지배 세력을 성장시켜서 마한 지역의 영도권을 가지게 하였고, 지금의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 연맹을, 그 동쪽에서는 사로 연맹을 성장시켜 고대 국가가 성립될 기반을 닦게 하였다.

농업이 크게 발전하여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예술적인 활동도 또한 발전하였다. 그러나, 아직 원시적 전통이 농후하게 남아 있어서 그들의 예술은 종교와 밀착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연모에는 그 모양이나 장식에 미를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 많다.

천군을 비롯한 무격(巫覡)들은 그들의 의식에 있어 제기를 사용하였는데,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의 예술품으로는 암각화가 유명하다. 울주, 고령 등지에서 발견된 암각화에는 원, 삼각형 등의 도안 무늬에 고래, 거북, 사슴, 호랑이, 토끼 등과, 사냥하는 장면이나 배를 타고 고기잡이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동심원(同心圓)은 태양을 상징하는 듯하며, 다른 농업 사회에서의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를 비는 뜻을 엿볼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부분)   
고기잡이에서의 성공을 비는 뜻이 엿보인다. 경남 울주 소재.

바위면을 쪼아서 새긴 이 암각화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활기 있는 생활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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