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근대 사회의 태동3. 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2) 시장권의 확대

공인의 활동

조선 후기에는 상업계에서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다. 본래 조선 왕조는 중농 정책을 내세워 수공업과 광업뿐만 아니라 상업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그 활동을 규제하였다. 따라서, 상업 활동은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시전 상인의 활동 외에는 거의 보잘것이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이래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널리 확산된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는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보다 촉진시켰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인구의 자연 증가뿐만 아니라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으로부터 유리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업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처음에는 공인들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공인(貢人)은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나타난 어용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이들은 관청별로 또는 물품의 종목별로 공동 출자를 해서 계를 조직하고 상권을 독점하였으며, 납부할 물품을 수공업자에게 위탁하여 수공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공인들은 서울의 시전뿐만 아니라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까닭에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都賈)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상의 대두

18세기 이후에는 사상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폈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도시에 사상들이 나타난 것은 17세기 초로서, 도시 근교의 농어민이나 소규모 생산자, 군졸 등이 직접 생산한 채소, 과일, 수공업 제품 등을 행상으로 판매하면서부터였다. 이어서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인구의 일부가 상업으로 삶을 이어 가고자 하여 시전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파는 중도아(中都兒)가 되기도 하였다.

시장도   

그런데 17세기 후반 이후에 이르러서 사상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상행위를 벌여 종루, 이현, 칠패 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종래의 시전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대해 일정한 부담을 지기로 하고 금난전권(禁難廛權)을 얻어 내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려 하였다.1)

그러나 사상들은 정부와 결탁하여 새로이 점포를 창설하거나, 금난전권이 적용되는 도성을 벗어나 송파 등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상권을 확대하면서 상행위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도고로 성장하여 갔다.

사상들의 도고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행해졌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즉,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의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사상 가운데서도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삼아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의 운송과 판매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하여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장시의 발달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천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지방민들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들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장시는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장시 중에서도 광주의 송파장, 은진의 강경장, 덕원의 원산장, 창원의 마산포장 등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장시 구역도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지역 안의 시장권에서 또는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단결을 굳게 하기 위하여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포구에서의 상거래

조선 후기에 상업 중심지로서 새로이 성장한 곳이 포구이다. 포구에서의 상거래는 장시에서의 그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수레와 도로가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는 물화의 대부분이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하여 운송되었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연해안이나 큰 강 유역에는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는 포구 간에 또는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면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2)

그 후 선상(船商)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전국 각지의 포구가 하나의 유통권을 형성하여 갔다. 특히, 칠성포, 강경포, 원산포 등의 포구에서는 장시가 열리기도 하였다. 포구를 거점으로 상행위를 한 상인은 선상, 객주, 여각 등이었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자라난 경강 상인은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한편,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들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대외 무역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발해졌다.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인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다. 청에서 들여 오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삼, 쌀, 무명 등을 팔고, 또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 주는 중계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들은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이었으며,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화폐의 보급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를 가지고 물건을 살 수 있었다.

화폐의 보급은 상품의 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전황(錢荒)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동전을 많이 주조해도 이를 유통시키지 않아 계속 동전이 부족한 현상을 전황이라고 한다. 이는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축적하였기 때문이었다.

1)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은 본래 상거래 행위를 감독하는 평시서의 고유 권한이었으나, 조선 후기 상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시전은 정부에 대해 국역의 부담을 지는 대신에 반대 급부로서 금난전권을 요구, 이를 취득하였다. 금난전권은 처음에는 육의전에만 허용하였으나, 후에는 많은 시전들이 이를 행사하였다.
2) 포구와 포구 간의 유통은 18세기 이전에는 큰 포구를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하여 큰 포구와 큰 포구, 또는 큰 포구와 그 주위의 장시를 연결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18세기 말 이래로는 작은 포구도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변해 갔다. 포구에서의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세력가들은 포구 주인권을 행사하여 상품 유통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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