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근대 사회의 태동3. 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4) 사회 변혁의 움직임

사회 불안의 고조

지배 체제의 모순은 19세기에 이르러 극도로 심화되어, 조선 사회는 이제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모든 면에서 기존 체제를 청산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이 날로 깊어졌기 때문이다.

왕권의 강화가 시도된 18세기 후반에는 어느 정도 정치 기강이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 모든 부문에서 부패가 극심하였다. 수령과 향리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축재에 열을 올렸다. 일반 농민들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부농이나 상인, 수공업자들도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수시로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수령이나 향리들의 부정과 비리를 적발하기도 하였지만, 체제적 모순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부조리를 일시적인 조치로 시정할 수는 없었다.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 갔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빈번하게 발생한 재난과 질병은 농민들의 고통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1820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수재를 겪었다. 이듬해에는 중국을 통해 유입된 콜레라가 만연하여 전 국민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고, 그 뒤 수 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전국 곳곳에서 기민과 유민이 속출하였고,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지에 도적이 출몰하였다. 그러한 무리 중에는 무기를 휴대한 화적이나 수적이 있었다. 그들은 집단화하는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이 때 밖으로부터는 서양 세력이 접근해 와, 연해안에서는 이양선(異樣船)이 빈번히 나타나 위기 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1)

예언 사상의 유행

사회가 변동하고 기존의 가치 질서가 무너지는 속에서 백성들 사이에 예언 사상이 유행하여 민심은 갈수록 불안해졌다. 즉,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 없는 낭설이 비기, 도참을 빌려 나돌았다. 정감록도 이 때에 유행한 비기였다.

예언 사상은 19세기 초엽부터 현저하게 나타나, 탐관 오리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이 빈발하였다. 예언 사상의 현실 부정적인 성격은 당시 농민들에게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한편, 불안과 학대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은 무격 신앙에 깊이 빠지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민간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던 무격 신앙은 굿을 통하여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개인적, 구복적 믿음이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는 현세에서 얻지 못하는 복락을 미륵 신앙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미륵 신앙은 일찍부터 왕조 말기의 변란 세력에 의해 변혁 사상으로 이용되어 왔다. 심지어는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고통과 불안에 허덕이고 있던 민중을 현혹하는 무리도 나타났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의지할 데가 없었던 피지배층에게는 정신적 피난처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동학과 서학

조선 후기 사회 불안이 고조되는 속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특히 동학의 발생과 서학의 보급이었다. 세도 정치 아래에서 고통을 받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그들이 처한 삶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하였지만,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거의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때에 동학(東學)이 창시되었다(1860).

동학을 창시한 사람은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였다. 그는 지배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서양 세력의 접근으로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농민들의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 주고자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 사상은 사회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 성리학과 불교를 배척하고, 동시에 서양 세력과 연결된 서학도 배격하였다. 동학의 기본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었다. 그 가르침의 바탕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회 의식이 깔려 있었다.

동학은 신앙 운동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후천 개벽을 내세워 운수가 끝난 조선 왕조를 부정하였고, 보국 안민을 내세워 서양과 일본의 침투를 경계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동학이 창시되자, 이를 따르는 신도가 급속도로 늘어나, 동학은 삼남 지방의 농촌 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다. 동학의 세력이 날로 번성하자, 정부에서는 동학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이를 탄압하였다.

한편, 사회가 혼란해지고 민생이 어려움을 겪는 속에서 서학, 즉 천주교가 전해졌다. 서학은 17세기에 베이징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양 문물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학문적 호기심에서 연구되던 서학은 18세기 후반부터는 민간 사회에 신앙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 땅에 크리스트 교가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서학에서는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 평등하며 내세에서의 영생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에 의해 관심이 기울여졌고,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천주교의 유포에 대하여 처음에는 방관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또 서학에서 천주를 내세워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제사 의식을 무시하자, 드디어 이를 사교로 규정하여 탄압하였다.2) 그러나 천주교의 교세는 몇 차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날로 확장되어 갔다.

농민의 동태

세도 정치로 인해 정치가 혼란해지고 삼정이 크게 문란해지면서 농촌 사회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탐관 오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고 횡포를 일삼았다. 이 속에서 농민들은 더욱 궁핍해졌다.

가난에 찌들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마침내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거나, 세금을 피하여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아예 국경을 넘어 간도나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하였다. 또, 도시나 포구 또는 광산촌과 수공업촌 같은 곳으로 흘러들어가 품팔이로 생계를 꾸려야 하였다.

유랑을 면할 수 있었던 농민들도 지주와 탐관 오리에게 압박과 수탈을 당해야 하였다. 그러나 무조건 순응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농촌에서는 계와 두레가 성행하였다. 계는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공동으로 타개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군포계, 제언계, 농구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두레는 농민들이 농경의 힘든 노동을 함께 나누면서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사회가 동요하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보다 강해져 갔다. 비리와 부정을 마구 자행하는 탐관 오리, 수탈을 일삼는 지주, 그리고 현실의 모순을 미봉책으로 모면하려는 무능한 정부에 대하여 농민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농민들은 이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스스로 개척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소청이나 벽서 등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 사회 모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홍경래의 난

농민들은 항조 또는 거세 등의 방법을 통하여 지배 체제에 항거하였다. 농민들의 집단적인 항거는 마침내 이른바 민란으로 발전하였다.

세도 정권 초기에 몰락 양반인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에서 대규모의 민중 봉기를 유도하였다(1811). 그는 세도 정권의 부패와 지주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이에 몰락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들이 그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그들은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크게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정부군에 의하여 5개월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전국적인 농민 봉기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실패한 이후, 사회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민중의 집단적 저항이 진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원인이었던 사회의 모순은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지배층의 부정과 탐학은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농민들의 항거는 진주 민란을 계기로 하여 북쪽의 함흥에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한다(1862). 이 때의 농민 항거도 결국은 진압되고 말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민중의 동요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 봉기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시정한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수취 체제와 지주 전호제가 가지는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농민들이 지향하였던 사회 개혁의 방향은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로서는 양반 지주들의 이해를 뒤엎는 지주제를 개혁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농민들로서도 그것을 변혁시킬 만한 역량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들의 봉기는 농민들이 사회의 모순을 자율적으로,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변혁시키려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1) 이양선이란, 서양의 상선이나 군함을 가리키는데, 18세기 이전에는 거의 표류에 의한 불가피한 접근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이래 이양선의 출몰은 정탐, 측량, 통상을 목적으로 한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조선에 처음으로 문호 개방과 교역을 정식으로 요구한 이양선은 1832년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난 영국 상선 암허스트 호였다.
2) 시파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조는 시파와 연결된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으므로 큰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여 벽파가 집권하자, 대탄압이 가해졌다. 즉, 1801년의 이른바 신유박해에 의해 이승훈, 정약종 등 3백여 명이 처형되었다. 그 후에도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 큰 탄압을 받았으나, 천주교의 교세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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