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1. 고대의 정치[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삼국 간의 항쟁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읽기자료

고구려의 왜 격퇴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하였다. …… 10년(400)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

성왕의 체제 정비

성왕은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세력 판도
신라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가야의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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