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1. 고대의 정치[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신라 말기 호족 세력과 후삼국의 성립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 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국호를 마진(후에 태봉으로 변경)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읽기자료

견훤궁예

견훤은 상주 가은현(경북 문경 가은)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자활하다가 후에 가업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 드디어 후백제 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었다. …… 〈삼국사기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 선종이 왕이라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은 오래 되어서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초적

백성이 경제적인 이유로 토지를 떠나 도적이 되면, 백성을 풀에 비유하여 초적이라 부른다.

호족의 출신 성분

호족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몰락한 중앙 귀족, 무역에 종사하면서 재력과 무력을 축적한 세력, 군진 세력, 지방의 토착 세력인 촌주 출신 등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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