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2. 중세의 정치[2]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궁예를 몰아 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태조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

당시 고려에 온 발해 유민 중에는 관리, 장군, 학자, 승려 등이 상당수 있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하였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고려의 민족 재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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