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2. 중세의 정치[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고려의 멸망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한편,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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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 대첩

우왕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로 쳐들어와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 연해의 주군(州郡)을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이 나서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왜선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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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대첩

○ 운봉을 넘어온 이성계는 적장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선두에 나서서 전투를 독려하여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섬멸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1600여 필의 군마와 여러 병기를 노획하였고, 살아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

홍건적

원 말기에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데서 홍건적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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