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3. 근세의 경제[2] 양반과 평민의 경제 활동

상업 활동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판매하여 유통시켰다.

한편,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명과는 사신이 왕래할 때에 하는 공무역과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하였고,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하였다. 그러나 국경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역은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거래된 물화는 무명과 식량이었다.

읽기자료

조선 전기의 상업

○ 장사꾼이 의복 등속을 판매하며, 심지어는 신, 갓끈, 빗, 바늘, 분(粉) 같은 물품을 가지고 무지한 백성에게 교묘하게 말하여 미리 그 값을 정하고 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그 값을 독촉해서 받는다. 〈세종실록〉
○ 경인년(1470) 흉년 때 전라도 백성이 서로 모여들어 점포를 열어 장문(場門:시장)이라 칭하고,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였다. 〈성종실록〉
임진왜란 이후 백성은 정해진 곳 없이 교역으로 생활하는 것이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각 읍에서 장시가 서는 것이 적어도 3, 4곳이 되어 …… 한 달 30일 이내에 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 없다.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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