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5. 근⋅현대의 사회[1] 개항 이후의 사회 변화

의식주 생활의 변화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과 제도가 들어오면서 서양의 생활 문화도 우리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도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의식주 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의생활에서 본격적인 변화는 양복이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일부 상류층과 개화 인사는 상투를 자르고 단발하였으며,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일반 남성의 복장은 예전처럼 바지와 저고리 차림의 한복이었는데, 저고리 위에 마고자와 조끼를 입는 풍습이 새로이 생겨났다.

개화기에 대부분 여성은 전통적인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을 본떠 만든 개량 한복도 등장하였다. 개량 한복은 여학생의 교복이나 신교육을 받은 여성의 옷차림으로 자리잡아 갔다. 여성의 외출과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입었고, 오랫동안 여성의 얼굴을 가리던 장옷과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고 양산이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여러 가지 음식 문화도 들어왔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한 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남녀가 또는 양반상민이 한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저와 함께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중과 일부 상류층에는 커피와 홍차, 양과자와 빵 같은 식품과 서양식 요리법, 식사 예절 등이 전해졌다.

임오군란 이후에 들어온 청나라 상인 중에서 일부는 음식점을 차리고, 중국 요리와 만두, 찐빵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또, 청⋅일 전쟁 이후에 들어온 일본인은 초밥, 우동, 어묵, 단팥죽, 단무지, 청주 등 일본 음식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외래 음식과의 접촉에 따른 식생활의 변화가 일반 서민의 음식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그 동안 신분에 의해 규제받던 주택 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가옥의 규모나 건축 양식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서울과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서양인과 일본인이 살게 되면서 서양식 건물이나 일본식 주택이 나타났다. 또, 관청이나 공공 건물, 학교 건물, 상업용 건물, 종교 건물 등 근대식 건물이 잇따라 세워졌다. 1890년대에 들어와 민간에서도 서양식 건축물의 이점을 살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마고자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깃과 동정이 없다. 앞을 여미지 않고 두 자락을 맞대어, 오른쪽 자락에는 단추를 달고, 왼쪽 자락에는 고리를 달아 끼워 입었다.
양복과 두루마기를 입은 개화 인사들
서양식 오찬을 즐기는 모습
명동 성당이 보이는 진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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