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5. 근⋅현대의 사회[2] 일제 강점기의 사회 변화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소작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다.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된 농민은 도시로 나가 노동자나 빈민이 되거나, 광부, 화전민 등으로 살아갔다. 여기에 자연 재해를 당한 농민들은 새 삶을 찾아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나갔다.

이런 가운데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전라 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도 소작 쟁의(1923)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암태도 농민은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본 경찰에 맞서 1년 가까이 싸워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의 소작 쟁의는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합법적 농민 조합 대신 비합법적, 혁명적 농민 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좌절되었다.

한편,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다. 1930년대에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노동 쟁의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이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 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마름

지주에게서 소작지의 관리와 감독을 위임받은 사람
소작 쟁의 발생 횟수와 참가 인원 수
노동 쟁의 발생 횟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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