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5. 근⋅현대의 사회[2] 일제 강점기의 사회 변화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변화

일제 강점기에도 인구는 늘어 갔다. 인구 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 국내 거주 한국인은 1700만 명 정도였다. 1930년에는 2000만명, 1942년에는 26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울(경성)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 명 정도였고, 1940년에는 93만 명 정도로 4배 가량 늘었다.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 개수 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같은 전통 건물을 마구 헐어 내고, 총독부, 경성부 청사, 경성 역사 같은 관공서와 공공 시설, 공원, 학교 등을 잇따라 건립함에 따라 서울의 모습은 점차 식민지 도시 풍경으로 변해 갔다.

한편, 1930년 무렵 서울에는 10만여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일본인은 본정(현 충무로), 명치정(현 명동), 황금정(현 을지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의 일본인 거리는 남촌, 북쪽의 한국인 거리는 북촌으로 불렀다. 당시 남촌의 거리는 서울의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백화점, 상가, 도로 포장, 신호등, 가로등, 네온등 등 근대 도시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북촌의 거리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도시의 이중적인 모습은 서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많이 살던 부산,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등 개항장이던 도시 대부분이 그러했다.

일제 강점기 서울의 명칭

조선 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면서 경성(京城)이라 고쳤고, 당시 일본 사람은 서울을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라 불렀다.
총독부 부근(1930년경)
본정(현 충무로) 입구(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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