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Ⅵ. 민족 문화의 발달4. 근대 태동기의 문화[1] 성리학의 변화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

인조반정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박세당이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을 벌였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들 사이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호락 논쟁을 벌였다.

한편,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하는 등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였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

호락 논쟁(湖洛論爭)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충청도 노론(호론)과 같다고 보는 서울, 경기 노론(낙론)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송시열(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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