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Ⅵ. 민족 문화의 발달5. 근⋅현대의 문화[1]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문학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의 요구가 절실했던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해 새로운 근대 사상을 소개하거나 사회적 자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8년을 전후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와 신소설이 등장하여 근대 의식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였다.

성경을 비롯하여 천로역정,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기 등이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번역 문학은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초래하는 폐단도 있었지만, 근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예술계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음악 부문에서는 서양 음악이 소개되었고,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가 유행하였다.

미술 부문에서는 화가들이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였고, 서양식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 회화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서민층에서는 민화가 유행하였다.

연극 부문에서는 신극 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 그러나 서민 사이에서는 판소리와 민속 가면극이 성행하였다. 특히, 판소리에서는 여러 명이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분창 형식이 유행하였고,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 정립에 이바지하였다.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서양 종교의 포교가 자유로워진 점이다. 천주교는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개신교는 1880년대에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교세를 넓혀 갔다.

동학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 때 친일 세력을 내쫓고 천도교로 개편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대종교가 창시되어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교에서는 박은식이 유교 구신론을 제창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에서는 한용운이 조선 불교 유신론을 내세우며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원각사
천도교 중앙 대교당(1921년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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