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민족의 새벽과 부족 국가의 자라남

(2) 원시 사회

원시인의 살림살이

우리 조상들이 이 고장에 옮겨왔을 때, 그들은 한 곳에 머물러 농사를 지으며 살거나, 또는 가축을 기를 줄 몰라 무리를 지어 몰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았다. 산과 들에서 저절로 나는 나무 뿌리나 열매를 따 먹거나, 짐승과 새를 사냥하였으며, 바닷가, 냇가에서는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 먹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 후 지혜가 발달되고 또 인구가 불어서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피, 보리, 기장 등의 곡식을 심어서 간단한 농사를 짓고, 또 소, 돼지, 말 같은 온순한 짐승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옷은 삼이나 칡 같은 식물로 만든 베옷으로 몸을 가리기도 하고, 짐승의 털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추위를 막기도 하였다. 집은 처음에는 굴 속을 이용하였으나, 차차 들에서는 움집을 만들고, 산에서는 귀틀집을 만들어 살았다.

원시 시대의 가옥   

그 때 원시인이 쓰던 연장은 주로 돌로 만든 간단한 것이었으므로, 농사만으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주로 하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차차 연장이 발달함에 따라, 농업과 짐승을 길들여 기르는 생활이 주로 되어, 그들은 냇가의 평야나 산 모퉁이에 자리잡고, 이곳 저곳에 마을을 만들며 씨족(氏族)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씨족은 조상을 같이한 한 핏줄기로써 대개 한 마을을 만들고, 서로 도우며 살림살이를 하였다. 씨족의 대표자로서, 선거에 의하여 족장(族長)을 뽑았으니, 그는 정치를 하는 군장(君長)인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임무도 겸하고 있었다. 여러 씨족은 결합하여 역사에 나타나는 고조선, 부여, 옥저, 예, 진국 등의 부족(部族) 사회를 이루었으나, 그 후에도 씨족을 중심으로 한 원시 생활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원시 시대의 유물

우리 조상들의 원시 생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이다. 그들의 유물은 대개 돌로 만든 석기(石器)이므로, 그들이 살던 시대를 우리는 석기 시대라고 부르나, 석기 시대라 하여 석기만을 쓴 것은 아니고, 그 외 목기(木器, 나무), 초기(草器, 풀), 패기(貝器, 조개껍질), 골각기(骨角器, 짐승의 뼈) 등의 연장을 만들어 사용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목기, 초기는 곧 썩어 없어지고, 또한 패기, 골각기도 남은 것이 적으나, 다만 석기만은 단단하여 지금까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석기로 만든 유물에는 도끼, 창, 칼, 살촉 등이 있고, 골각기로서는 살촉, 낚시, 바늘 등이 있다. 또한 그 외에 많은 토기(土器)가 땅 속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구운 유치한 것이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고 또 무늬를 새겼기 때문에, 그 취미와 성격을 연구하면 원시시대 문화의 관계를 짐작할 수가 있다.

석기 시대의 유물   

이러한 유물 밖에, 그들의 많은 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그 중 특히 원시인의 생활을 연구하는 데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조개묻이(貝塚)이다. 이것은 원시인이 먹고 쓰다 내버린 쓰레기의 무덤인데, 그 안에 당시의 많은 유물이 잘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원시 사회를 밝히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조개묻이는 우리 나라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경상남도 김해(金海)와 황해도 몽금포(夢金浦)의 것이 유명하다.

고인돌(支石) 및 선돌(立石)도 석기 시대 유적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세계 어느 민족이나 가지고 있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형태로, 유럽, 아프리카, 인디아, 남양 등에 널리 퍼져 있으나, 극동에서는 만주와 우리 나라에만 있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점이 독특하다. 이것은 원시인의 신앙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고인돌은 가족의 공동 무덤이고, 선돌은 부락과 부락의 경계를 표시하는 신성한 표지였다. 이 밖의 유적으로는 원시인이 살던 굴과 옛 무덤이 있으며, 또한 산에 제사 지내는 돌무덤도 남아 있다.

고인돌과 선돌   

〈알아두기〉

석기. 씨족. 조개묻이. 고인돌. 골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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