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우리 나라 역사의 시작

3. 여러 나라의 발전

〔학습 개요〕

우리 나라의 철기 문화는 서기전 4세기경에 보급되어, 서기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의 남부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사용되어, 청동기 시대보다 농업 생산력과 전투력을 높여 줌으로써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서 국가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무렵에 등장한 국가로서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가 있었으며, 한반도의 남부 지방에는 삼한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들은 문화의 차이로 말미암아 발전의 정도가 달랐다.

학습 문제

1. 철기의 사용은 사회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2.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어떠한 나라들이 성립되었는가?

3. 새로이 형성된 국가들의 생활 모습은 각각 어떠하였는가?

철기 문화와 사회의 발전

우리 나라에 철기가 보급된 것은 서기전 4세기경이었다. 처음에는 청동기도 함께 사용되고 있었으나, 서기전 1세기경부터는 철기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철기 문화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은 물론, 남부 지방까지 확산되어 김해, 창원 등지에서도 그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철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널무덤과 독무덤이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인 널무덤에서는 세형 동검, 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 그리고 수레와 말의 장식품 등이 출토되고 있다. 독무덤은 독이나 항아리에 죽은 사람을 넣어서 묻은 무덤인데, 이것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철기 시대의 유물은 다양하지만, 특히 농기구와 무기가 대부분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이 귀하여 무기와 종교 의식에 쓰이는 의기만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철기 시대에는 철로써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까지 만들어 사용하였다.

철제 무기로는 칼, 창, 화살촉 등이 있고, 농기구로는 보습, 괭이, 낫 등이 있다. 철제 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사짓기가 쉬워졌으며, 생산량도 늘어났다. 그리고 이 시기의 지배자들은, 철제 무기를 사용하여 정복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철제 무기와 농기구   

철기 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는 새로운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국가는 종래보다 더욱 발전된 정치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 지방에서는 고조선이 보다 강성해졌으며, 그 주변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 지방에서는 삼한 사회가 형성되었다.

여러 나라의 위치   

부여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잡고, 고조선에 이어 큰 국가를 이룩하였다.

부여의 정치는 왕과 군장 출신으로 구성된 관리들이 맡아 보았다. 왕 밑에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로 불리는 관리가 있었다. 이 중에서, 동물 이름이 붙은 여러 가는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군장이며, 대사자와 사자는 본래부터 왕에게 직속되어 있던 관리였다.

지배자들 이외에 하호라고 불리는 백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싸움터로 나가야 했다.

부여의 법률은 매우 엄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종으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것의 12배로 갚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부여의 법률은 고조선의 법과 마찬가지로, 남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데 그 뜻이 있었다.

부여에서는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치르면서,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겼는데, 이 때에는 죄인을 풀어 주기도 하였다. 또, 부여인들은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왕이 죽으면 평소에 따르던 사람까지도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 세운 국가였다(서기전 37). 고구려인들은 험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으므로, 그들의 기질은 자연 억세고 날랬다.

그 후, 고구려는 서울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주위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합치면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고구려는 5개의 부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5부 중에서 계루부는 왕족이었으며, 절노부는 왕비족이었다. 왕족은 왕비족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왕 아래에는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등의 관직이 있었다. 이 중에서 상가는 종래의 군장 출신이었으며, 대로와 패자는 왕에게 직속되어 있던 관리들이었다.

이 밖에, 5부의 우두머리들도 왕과 마찬가지로 그 밑에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낮은 관리들을 둘 수 있었다. 고구려의 지배층은 일반 백성인 하호가 바친 쌀, 물고기, 소금 등으로 생활하였다. 법률은 매우 엄하여, 무거운 죄를 지으면 곧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종으로 삼았다.

고구려인들은 10월에 동맹이라는 큰 잔치를 베풀고, 하늘과 시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무예를 숭상하여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였다. 또, 고구려에는 데릴사위의 풍습이 있었다.

옥저와 동예

함흥 평야를 중심으로 하는 함경도 해안 일대에는 옥저가 있었고, 그 남쪽에는 동예가 있었다. 이 두 곳은 국가로서의 발전이 늦었기 때문에, 왕이라 칭하는 지배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장들이 각각 마을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옥저의 옛 성터(함경 남도)   

옥저는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기에 알맞았으므로 살림살이가 넉넉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베와 소금, 어물 등의 특산물을 고구려에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옥저에는 고구려와는 달리, 민며느리의 풍습이 있었다.

동예에서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하였다. 동예인은 산천을 중히 여기고,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또, 읍락끼리는 서로 침범하지 않았는데, 만약 이를 어기면 소, 말 등으로써 갚아야만 하였다.

삼한(한)

고조선이 발전하고 있었을 때, 한강 이남 지역에는 진이라 불리는 국가가 있었다. 그 후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부터 마한, 진한, 변한 지역에는 여러 나라들이 성립되었다. 마한은 54개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변한,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한의 여러 나라는 대체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다. 정치를 맡은 군장들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신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천신에 대한 제사를 맡은 종교적 지도자를 천군이라 하였다. 천군은 소도라는 신성 지역을 맡아서 주관하였다. 이 곳에는 군장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죄인이라도 이 곳으로 도망해 오면 잡아 가지 못하였다.

솟대   

삼한에서는 특히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하였다. 삼한 사람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상주의 공검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등의 저수지도 만들었다.

한편,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를 화폐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한 군현, 일본 등지로 수출하였다.

삼한의 풍속은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여러 사람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즐겼다. 이는 봄에 풍년을 빌고, 가을에 추수를 감사하기 위한 행사로서, 뒷날에는 5월 단오와 10월 상달의 풍속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 학습 정리 ◇

1. 서기전 4세기경에 보급된 철기 문화는 농업 생산력과 전투력을 높여 주었다.

2. 철기 문화가 보급됨에 따라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 중에서 부여와 고구려 등은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3. 새로이 형성된 국가들은 비교적 정비된 정치 조직을 갖추었으며, 농업과 관계되는 제천 행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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