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일 신라와 발해1.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3] 발해는 왜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었나?

해동성국

건국 후, 발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해는 북쪽으로 돌궐과 통하고 바다 건너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당은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에는 발해와 신라 사이에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어느 정도 교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 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정효 공주 묘실 | 중국 길림성 화룡
전성기 발해의 영역
보상화무늬 벽돌 | 상경 용천부 출토
치미 | 동경 용원부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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