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Ⅴ. 조선의 성립과 발전2. 사림 세력의 성장[1]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은 왜 다투었을까?

사림의 성장

조선은 건국 후 약 100년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것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15세기 말부터 사림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기존의 훈구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머무르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던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었다. 이 무렵, 성종 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망이 높은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주로 언론 기관에 배치하고 정책을 비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점차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의 잘못을 예리하게 공격하면서 공론 정치를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두 세력 간의 정치적 다툼이 점점 심해졌다.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무오사화 등을 일으켜 사림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사림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중종반정사림이 다시 등용되어 조광조를 중심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일어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왕의 외척들 사이에 사화가 일어나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사림은 큰 피해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으며, 향촌의 서원향약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갔다.

사화

사림의 화’의 준말. 관리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몰려 참혹한 화를 입었던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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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유자광이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내놓았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의 내용을 지적하면서 여러 추관들에게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가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를 하여 왕께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전하(세조)를 헐뜯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덕한 죄는 마땅히 대역으로 논해야 하고, 그가 지은 다른 글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마땅치 못하오니, 아울러 모두 불태워 버리소서.”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연산군일기

조광조개혁 정치

조광조는 추천에 의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고, 도덕을 중요시하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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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량과

지난번 조광조가 아뢴 바 천거로 인재를 뽑는 일은 여럿이 의논한 일입니다. 각별히 천거하는 것은 한의 현량과와 효렴과를 따르는 것이 가합니다. 이것은 자주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를 시행할 만한 기회입니다. 혹 뒤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고, 혹 공평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대체로 좋은 일이니 비록 한두 사람이 천거에 빠진다하더라도 주저할 것 없이 시행해야 합니다. …… 어찌 한두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좋은 일을 폐지하겠습니까?
중종실록’
김종직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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