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중립 외교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광해군은 명이 점점 쇠퇴하고 북방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있는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외교적으로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에 눌려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다가, 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되자, 후금을 세우고 명의 변경을 위협하였다. 명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다.
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으로서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강홍립으로 하여금 출병하게 한 후 정세에 따라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이와 같은 중립 외교 정책을 폄으로써 외침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