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1. 흥선 대원군의 정치[1] 흥선 대원군은 무엇을 개혁하려 하였나?

내정 개혁

나이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집권한 흥선 대원군세도 정치하에서 흐트러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잘못된 정치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크게 환영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 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리고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려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고 농민을 괴롭혀 오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치 않는다.”는 단호한 결의로 47개소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또,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중건하였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비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세도 정치 때문에 어지러워진 정치를 안정시켰고, 국가 재정을 늘렸으며, 백성들의 기대에도 어느 정도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대하여 일부 양반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특히, 서원을 정리하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양반이 많았다. 한편, 흥선 대원군경복궁다시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고,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을 거두었으며, 도성 문을 드나드는 백성들에게 문세를 거두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 당백전의 사용으로 물가가 올라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서원의 특권

서원에 속한 유생들은 면역의 특권을 누렸으며, 서원의 토지는 면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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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권 강화를 위한 흥선 대원군의 의지 ⋅

흥선 대원군은 외척 세도 정치의 그늘에서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에 눌려 살아야 했던 그는 왕실의 허약함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정권을 장악한 후에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집권 후 그는 “나는 천 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제공(諸公)은 어떠시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 리를 끌어다가 지척으로 삼겠다.”는 말은 왕실의 종친을 왕족답게 우대하겠다는 것이고,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로 만든다.”는 말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뜻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인다.”는 말은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사창제

각 지방 군⋅현에 설치된 곡물대여 기관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호하도록 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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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고종 2년(1855) 3월에 서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만동묘의 철폐를 명하였다. 그러나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 공사병인양요를 치르는 동안 실행이 지연되다가,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명을 내려 문묘에 모신 인물에 한하여 각각 서원 1개소씩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유림은 크게 반발하였으나, 명령을 위반하는 군⋅현은 그 수령을 엄벌하고, 반항하는 유생들을 강경하게 추방하여, 결국 오랫동안 백성들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던 서원은 철폐되고 토호와 유생들도 스스로 근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약화된 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유림 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흥선 대원군은 결국 이들 유림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자운 서원과 묘정비 | 경기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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