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2. 개항과 개화 운동[3]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통해 이루려 하였던 것은?

갑신정변

조선은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고, 다시 집권한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근대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개화파 세력에게는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1884).

이들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개혁 정책에는 청에 대하여 자주권을 내세우고, 문벌 타파와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즉, 개화당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를 개혁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 사상이 국민 속에 퍼지지 못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개혁이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의 방식으로 추진됨으로써 국민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개입한 것도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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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전개 과정 ⋅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오후 7시경, 우정국 신청사에서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는 주인격인 홍영식과 손님격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 조선측 인사들과, 외국인으로 미국 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및 통역관,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연회가 거의 끝나 가는 오후 10시경, 별안간 밖에서 불이 났다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자, 민영익이 재빨리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듯 도로 들어와 쓰러졌다. 몸에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개화파는 재빨리 국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궐 문은 미리 내통한 문지기에 의해 열렸으며, 김옥균 등은 취침 중이던 국왕을 만났다.
김옥균은 국왕과 왕비 및 왕세자 일행을 이웃에 있는 경우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지키면서 청군의 습격에 대비하였으며, 궐내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와 군인들이 수비하였다. 김옥균 등은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처단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갑신정변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조선 주둔 청군과 일본군의 수

갑신정변 당시 조선에는 1500여 명의 청군과 200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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