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Ⅷ.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1. 독립 협회와 대한제국[1] 을미의병이 일어난 까닭은?

을미의병

일본의 명성 황후 시해와 내정 간섭으로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단발령은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단발령은 겉으로는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내세운 것이었으나, 여기에는 한국의 전통을 끊음으로써 한국인의 민족 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정략이 숨어 있었다.

단발령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단발령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관직에서 사직하거나 학생들이 학교를 자퇴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이를 훼손하는 것은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고 하면서 반발하였다.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병 운동은 그전부터 서양과의 교섭, 특히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반대하면서 그들의 침략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 때에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이항로의 영향을 받은 이소응, 유인석 등이 있었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 운동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한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읽기자료

⋅ 이건창 등의 연명 상소문

20일에 일어난 참변(명성 황후 시해)은 적이 시해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지만, 그것이 적의 소행인지 우리 나라 사람의 소행인지 아직 판명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면 관직이 있는 사람은 그를 살해하여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임금과 부모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으므로 병사를 되돌리지 않고 싸운다.” 라고 하였습니다. ……
아! 그 변란이 일어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위로는 왕세자로부터 아래로는 관원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통곡 한 마디 못 하고 상복 한번 입자는 말 한 마디 없으니, 천하의 이치와 인정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
아! 슬프다. 신 등이 대대로 국록을 받고 후한 은덕을 입은 사람으로서, 이 흉변을 당하여 당연히 죽어야할 사람이 죽지 않고 궁벽한 시골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상도 하지 못한 채 하늘을 우러러 끝없이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매천야록’
단발 지령문과 반대 통문
유인석의 초상과 그의 글씨
유인석의 초상과 그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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