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원년(1399)
기묘 원년(己卯元年, 1399) 봄 정월 초하루에 태상황(太上皇, 태조)께 문안을 올리신 후 정전(正殿)으로 돌아와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으셨다. 평양 부윤(平壤府尹) 성석린(成石璘)이 「의기도(欹器圖)」1)를,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觀察使) 이정보(李廷俌)가 『역년도(歷年圖)』2)를, 경기우도 관찰사(京畿右道觀察使) 최유경(崔有慶)이 「무일도(無逸圖)」3)를 바치니 왕께서 모두 기쁘게 받으셨다. 호서(湖西, 충청도를 달리 이르는 말)의 백성이 궁성(宮城)을 덮는 데 쓰이는 띠풀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를 그만두라 하셨다. 올적합(兀狄哈, 여진의 한 부족)이 왔다.
3월에 한양(漢陽)에 궁궐이 막 지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백성이 살 만한 집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에 백관과 군민(軍民)이 모두 옛 도읍 개성(開城)을 그리워하고, 태상왕께서도 역시 개성에 뜻을 두셨으므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겼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 후 문신들을 교대로[更日] 모아 강론하다가 보문각(寶文閣)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마전(麻田) 앙암사(仰岩寺)에 전각을 지어 고려(高麗) 태조(太祖),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8왕4)의 제사를 모셨다.
여름 5월에 일본(日本) 대장군(大將軍)이 토산품을 바치고 남녀 포로 1백여 명을 모두 돌려보냈으며, 올량합(兀良哈)5)이 이리를 바치자 들판에 놓아 주라고 명하셨다. 일본 섬[海島]의 해적이 풍해도(豊海道, 지금의 황해도) 및 서북면을 침략하자 투항해 온 왜인 구륙(仇陸)을 파견하여 타일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아뢰어 청한 바[奏請]에 따라 제수법(除授法, 관직을 내리거나 물러나게 하는 법)을 행하니 이름을 세말도목정(歲末都目政)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