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2년(1399)
다음 해(1400) 봄 2월에 왕이 태상왕께 아뢰어 정안군(靖安君, 태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시고 세자부(世子府, 세자의 궁[東宮]에 두었던 관아)를 인수부(仁壽府)라 하셨다.
여름 4월에 경군관 12패(京軍官十二牌)1)를 교대로 숙직시키는 법을 정하였으며, 모든 절제사(節制使)가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찬성사(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관제를 개정하였는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중추원(中樞院)을 삼군부(三軍府)로, 좌⋅우복야(左右僕射)를 좌우사(左右使)로, 중추원 승지(中樞院承旨)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고쳤다. 예문관(藝文館)에 대학사(大學士)와 학사(學士)를 두고, 종실(宗室)의 기친(期親)2)과 대공친(大功親)3)을 군(君)으로 봉하여, 부마(駙馬, 왕의 사위)와 함께 직임(職任)을 맡지 못하도록 하였다.
6월에 태상왕을 위한 궁(宮)과 [담당 관청인] 부(府)를 설치하였는데 궁을 덕수(德壽)라 하고, 부를 승녕(承寧)이라고 이름하였다. 환조(桓祖, 태조의 아버지)의 진전(眞殿, 왕의 초상화를 모신 전각)에 계성전(啓聖殿)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호부(虎符)4)를 만들어 안팎으로 병사를 동원할 때 사용하였다.
가을 9월에 왕께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나아가 [태상왕께] 장수를 기원하며 술잔을 올리셨다, 태상왕께서 시를 지어, “나이는 비록 70이지만 마음은 서로 통하는구나.”라고 읊으시니, 왕께서 “밤이 이미 삼경인데 흥은 끝이 없사옵니다.”라고 화답하였다. 제주(濟州)의 백백 태자(伯伯太子)5)가 환관을 파견하여 좋은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쳤다. 유구국(琉球國)의 왕 찰도(察度)는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품을 바쳤으며 그 세자 무령(武寧)은 예물을 바쳤다.
겨울 11월에 왕께서 왕세자에게 선위(禪位)하셨다. 세자가 즉위하시고 선왕을 높여 상왕(上王)이라 하고, 부를 공안(恭安)이라 하셨고, 중궁(中宮, 왕후)의 부는 인녕(仁寧)이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