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태조(太祖)-선조(宣祖)세조조(世祖朝)

세조 2년(1456)

병자 2년(丙子二年, 1456)1)에 왕께서 상왕을 위해 술과 음식을 올리는 잔치를 여셨다. [왕께서] 어찌하면 어질고 재주 있는 인재들을 조정에 모두 출사하게 할 수 있는지, 쓸데없는 관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는 것이 좋을지, [백성들을 곤궁하게 하지 않으면서] 성보(城堡)를 모두 수축(修築)할 수 있는 방안을 근정전(勤政殿)에 모인 선비들에게 친히 물으셨다. 보제원(普濟院)에서 나이 많은 신료들을 위한 잔치를 베푸시면서 승지(承旨) 박원형(朴元亨)을 보내 위로하셨다.

양성지(梁誠之)가 상소로 진술한 내용을 따랐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경(上京)은 한성(漢城)으로, 중경(中京)은 개성(開城)으로, 동경(東京)은 경주(慶州)로, 남경(南京)은 전주(全州)로, 서경(西京)은 평양(平壤)으로, 북경(北京)은 함흥(咸興)으로 정하고, 중악(中岳)은 삼각산(三角山)으로, 동악(東岳)은 금강산(金剛山)으로, 서악(西岳)은 구월산(九月山)으로, 남악(南岳)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북악(北岳)은 장백산(長白山)으로 하였다. 고려 왕조 때 시행된 좌보(左輔)⋅우보(右輔)의 사례에 따라 양주(楊州)를 후보(後輔)로, 수원(水原)을 전보(前輔)로, 광주(廣州)를 좌보(左輔)로, 부평(富平)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쌍기(雙冀), 최충(崔冲), 이제현(李齊賢),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고 당(唐)나라 제도를 따라 무왕(武王)과 성왕(成王)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고려 왕조의 문익점(文益漸)은 목화씨를 처음으로 [원나라에서] 얻어 왔으며, 최무선(崔茂宣)은 화포를 처음으로 [원나라에서] 배워 왔으므로 [그 공을 기리기 위하여] 두 사람 모두의 사당을 자신들의 본적지에 세워주었으며, 그 후손들을 채용하였다. 여자들이 장의(長衣,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려 쓰던 옷)를 입는 것을 금지하여 남자와 여자가 옷 입는 법을 구별하였다. 문신과 양반들의 자제 중 나이가 어린 자들을 뽑아 중국어를 연습하여 익히게 하였다.

여름 6월에 집현전(集賢殿) 학사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과 전(前) 절제사(節制使) 유응부(兪應孚) 등이 상왕을 복위하려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시킬 것을 논의하였다. 또한 집현전을 혁파하여 그곳에서 보관하고 있던 서적들은 홍문관(弘文館)이 담당하게 하였다. 역대의 위판(位版)을 다시 정했다. 고조선(古朝鮮)의 시조 단군(檀君), 후조선의 시조 기자(箕子), 고구려(高句麗)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신주에 ‘지위(之位)’ 두 글자를 첨가하였다.

1)원문에는 원년(元年)으로 되어 있으나,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1456)의 기사이므로 바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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