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태조(太祖)-선조(宣祖)중종조(中宗朝)

중종 14년(1519)

기묘 14년(己卯十四年, 1519)에 윤탁(尹倬)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삼았다. 윤탁이 태학(太學, 성균관)의 뜰 안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보게 심어 놓고 배우는 자들을 경계하기를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반드시 무성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김식(金湜) 등 28인을 발탁하였다. 중외에 향약법(鄕約法)을 실시하였다. 이때 정응(鄭譍)은 서한문(西漢文)1)을 법으로 삼았고, 기준(奇遵)은 염락학(濂洛學)2)을 흠모하니 사람들이 ‘쌍벽(雙璧)’이라 칭하였다.

가을 9월에 왕께서 태뢰(太牢)3)로 선성(先聖, 공자)에 제사 지내셨다.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윤탁, 김식, 이득전(李得全), 정옥형(丁玉亨)에게 명하여 『주역(周易)』 태괘(泰卦)를 강독하도록 하시고, 신광한(申光漢), 민수천(閔壽千), 박훈(朴薰)에게 명하여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을 강하게 하셨다. 이종경(李宗慶), 최경홍(崔景弘)으로 『대학(大學)』을 강하게 하였다. [이때]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구경하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겨울 11월에 남곤(南袞)이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를 무구(誣構, 죄가 없는 사람을 죄가 있는 것처럼 속여서 꾸밈)하였다. 그 전에 [남곤이] 단물로 대궐의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산에 사는 곤충들이 그 잎을 먹게 한 후, 홍경주(洪景舟), 심정(沈貞) 등과 함께 밤중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상변(上變)하였다. 조광조 등을 옥에 가두니 영상(領相) 정광필(鄭光弼)이 [조광조를] 힘써 구원하였다. [조광조는] 죽음에 임하여 시(詩)를 짓기를 ‘임금 사랑하길 아버님 사랑하듯, 저 하늘 저 태양은 이 마음 알리라.’라고 하였다.

1)한(漢)의 학문은 크게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으로 나뉜다. 금문(今文)이란 한나라 때 통용되던 문자인 예서(隷書)를 뜻하며, 전한(前漢, 서한)의 경서(經書)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뒤에 학자들이 외우고 있던 책을 예서(隷書)로 적은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로써 해설된 경학을 금문학(今文學)이라 한다. 그런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공벽(孔壁)’, 즉 공자의 자손 집 벽에서 진(秦)나라 이전에 쓰던 문자로 작성된 경서가 발견되었다. 이를 고문(古文)이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설된 경학을 고문학이라 한다. 고문학은 후한(後漢, 동한) 이후 번성하였다. 여기서의 서한문은 금문학을 말한다.
2)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惇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형제가 닦은 학문을 말한다.
3)소⋅양⋅돼지 세 짐승의 고기를 모두 쓴 요리로 아주 훌륭한 음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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