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태조(太祖)-선조(宣祖)선조조(宣祖朝)

선조 8년(1575)

8년(1575)에 고(故) 처사(處士) 서경덕(徐敬德)의 도의(道義)를 논의하여 우의정(右議政)에 증직하였다. 서경덕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만을 닦았다. 그는 하늘의 이치를 궁구할 때 ‘천(天)’이란 글자를 벽 위에 써 놓고서 그 뜻을 고심하였고, 뜻을 터득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벽 위에 써 놓으면서 [공부하였다.] 그의 문인 박순(朴淳), 허엽(許曄)이 더 높은 직으로 추증하자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올렸다.

왕께서 김효원(金孝元)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심의겸(沈義謙)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제수하였다. 심의겸은 인순 왕후(仁順王后)【명종(明宗)의 왕후】의 가까운 지인으로 명종 연간에 사인(舍人)으로서 영상(領相)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그 아들이 거처하는 곳에 진사(進士) 김효원의 침구(寢具)【혹은 그 가문이 김효원이 선비로서 얻은 신망을 흠모하여 거짓으로 갖추어 둔 것이라고도 한다.】가 있는 것을 보고 김효원이 위세 있는 집안에 기대어 아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천하게 여겼다. 김효원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오건(吳健)이 그를 전랑(銓郞)으로 천거하니 심의겸이 막아서 못하게 하였다. 후에 김효원이 전조(銓曹)1)에 들어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전선(銓選)으로 천거한 자가 있었는데 김효원이 천관(天官)은 외척(外戚)의 집안의 재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각을 세웠다. 심의겸은 장의동(彰義洞)에, 김효원은 낙산(駱山) 아래에 거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의겸을 돕는 이들을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효원을 돕는 이들을 동인(東人)이라 하였다.

1)이조(吏曹)와 호조(戶曹)를 두루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이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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