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태조(太祖)-선조(宣祖)선조조(宣祖朝)

선조 22년(1589)

다음 해(1589)에 일본(日本) 도요토미 히데요시[平秀吉, 豊臣秀吉], 히라요시[平義智], 겐소[玄蘇] 등이 본국의 포로를 돌려보내고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1)을 포박하여 보내 왔다. 히라요시 등은 조총(鳥銃) 몇 병(柄)을 바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조총을 사용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전(前) 수찬(修撰) 정여립(鄭汝立)이 호남(湖南)에서 강학(講學)한다는 것을 사칭하여 무뢰배를 모아 놓고 잡술(雜術)에 두루 통하여 여러 무사와 대동계(大同稧)를 만들었다. 또한 해서(海西)에 말을 퍼뜨리기를 “길삼봉(吉三峯)과 삼산(三山)이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智異山)과 계룡산(鷄龍山)에 들어가기로 한다.”라고 하였다. 또 “정팔룡(鄭八龍)【정여립의 어린 시절 이름】은 신비하고 용맹한 사람으로 왕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황해 관찰사(黃海觀察使) 한준(韓準)이 정여립이 모반하려는 정황을 고발하니, 정여립이 진안(鎭安) 산골에 도망가 숨었다. 정여립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하였고, 그의 무리는 모두 형벌로 죽었다. 박연령(朴延齡), 박문장(朴文章)을 심문하여 얻어 낸 진술에 길삼봉을 최삼봉(崔三峯)이라 하였기 때문에, 최삼봉이라는 자를 찾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색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여순(洪汝淳)이 최영경(崔永慶)으로 오인하고 장계하여 체포하였다. 최영경은 영남(嶺南) 사람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였으며 성품이 맑고 마음을 닦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의정(右議政) 정철(鄭澈)이 위관(委官,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한 재판장)이 되어 힘써 그를 모함하다가2) 위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흡(李洽), 송상현(宋尙賢)이 다시 추국을 열 것을 청하여 [최영경은 결국] 옥중에서 죽었다. 후에 홍여순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최영경을 삼봉으로 무고하여 죽인 자가 정철이라고 아뢰었다. 양천경(梁千頃)이 무고한 내용도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이산해(李山海)는 [정철이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여 자신의 세를 늘리고자 하였으므로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북인(北人)이 되었고, 우성전(禹性傳)은 이와 같이 파급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다가 탄핵을 당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우성전의 주장을 도와서 남인(南人)이 되니, 이는 동인의 가운데서 남북의 의견이 처음으로 갈린 것이다.

1)원문에는 사대동(沙大同)으로 되어 있으나, 사화동(沙火同)으로 바로잡는다.
2)원문에는 모함이 아니라 ‘力救’, 즉 힘써 구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선조실록』 등에는 정철이 최영경과 사사로운 감정으로 얽혀 있다가 이때 앞장서서 그를 무고하였기 때문에 결국 최영경이 화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다. 『국조사』의 저자 역시 훗날 홍여순이 정철이 최영경을 무고하여 죽였다고 주장한 내용을 바로 뒤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용을 혼동하였다기보다는 글자를 잘못 쓴 듯 보인다. 원활한 내용 이해를 위해 여기서는 ‘力救’를 힘써 모함하였다는 뜻으로 의역하였음을 밝힌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