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동국역사 권수(卷首)

기자 조선기(箕子朝鮮記)

기자는 자(子)가 성(姓)이고,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자작(子爵)으로 기(箕)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고 불렀으니, 은(殷)나라 왕 성탕(成湯)의 후예이고 주왕(紂王)의 제부(諸父)이다. 주왕의 태사(太師)가 되었다가 주왕의 무도(無道)함을 보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것처럼 꾸며서 노비가 되니 주왕이 잡아 가두었다. 그 이후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천하를 얻게 되자 기자를 석방하고 인하여 도(道)를 물으므로, 기자가 홍범(洪範) 9주(疇)를 진술하고 남녀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피해 들어와 평양에 도읍하였다.

기자가 이에 예의(禮義)와 농사, 양잠, 베 짜기를 백성에게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정하였다. 살인자는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르게 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써 배상하고, 도둑질한 자는 남녀가 그 집에 들어가서 노비가 되도록 하고, 재물을 바쳐 노비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자는 한 명당 50만인데, 비록 풀려나서 양민이 되더라도 풍속이 오히려 수치라 하여 결혼하기가 어려웠다. 이로 인해 도적이 없어져서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자가 정숙하고 믿음이 있으며 음란하지 않았다. 들판을 개간하고 음식은 그릇을 사용하니, 어질고 현명한[仁賢] 교화가 두드러졌다.

기자의 자손이 국경을 점차 개척하여 서쪽으로 요하(遼河)를 지나고, 남쪽으로 한강(漢江) 이북 춘천(春川)에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함흥(咸興)과 강릉(江陵)까지 예속하였다. 그 후에 자손이 교만하고 포학해지므로 연(燕)나라가 진개(秦開)를 보내 서쪽으로 2천 리의 지역을 공격하여 취하고 만반한(萬潘汗)【요동(遼東) 3현(縣)의 이름】으로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몽염(蒙恬)을 보내어 장성(長城)을 쌓아 요동에 이르니 기자 40세손1)인 부(否)가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한 지 20여 년 한(漢)나라 초에 이르러 연나라 왕 노관(盧綰)과 함께 패수(貝水)【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킨다.】를 경계로 정하였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에 들어가니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서쪽 경계에 머물고자 하였다. 준왕이 그를 박사(博士)로 삼고 100리를 다스리도록 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위만이 망명한 사람들을 꾀어 무리를 모으고 준왕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한나라 병사가 열 갈래 길로 침략해 오니 청컨대 머물러 지키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준왕을 습격하였다. 준왕이 대적하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군(益山郡)】에 도달하여 마한(馬韓)을 공격하고 스스로 마한이라고 칭하였다.

1)원문에는 41대손(四十一代孫)으로 되어 있으나, 40세손으로 바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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