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동국역사 권수(卷首)

위만 조선기(衛滿朝鮮紀) [부(附) 4군(郡) 2부(府)]

위만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12년(서기전 195)에 연나라 왕 노관(盧綰)의 반란으로 인해 조선에 들어가서 기준(箕準)을 쫓아내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그 주변 여러 읍을 복속시켰다.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종하니 영토가 수천 리에 달했다. 그의 자손 우거(右渠)에 와서 한나라 무제(武帝)의 사신 섭하(涉何)가 살해되니, 무제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筍彘)를 파견하여 공격하였다. 우거가 병사를 보내 서로 겨루도록 하였으나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않으니, 한나라가 다시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공격하였다. 그 다음해(서기전 108) 우거의 신하 한도(韓陶) 등이 우거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하므로 위씨(衛氏)가 3대에 와서 결국 망하니 그 왕업을 이어 온 해가 87년이었다.

한나라가 이미 우거를 격파하고 낙랑(樂浪), 임둔, 현도(玄菟), 진번 4군을 설치하였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서기전 82)에 4군을 고쳐서 2부를 설치할 때에 진번과 현도를 평주도위부(平州都尉府)로 삼고 임둔과 낙랑을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로 삼아 관리를 파견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이때에 백성이 한나라의 법령을 따르지 않고 군장을 스스로 세웠으며, 또한 고구려(高句麗)가 서북 지역에서 일어나 현도와 낙랑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한나라가 그 지역이 멀고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도위부를 폐지하였으며, 한나라 영제(靈帝)는 현도, 낙랑, 요동(遼東) 등에 태수(太守)를 임명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위(魏)나라에까지 이르렀다. 고주몽(高朱蒙)의 후손이 점점 강대해져서 모용씨(慕容氏)가 망한 후에 4군의 땅을 전부 탈환하니, 위만으로부터 주몽 원년(서기전 37)까지 모두 158년이었다.

낙랑은 평양부와 춘천(春川)까지이고, 임둔은 경기 서쪽 교외 지역과 황해 동도(黃海東道)이며, 현도는 함흥부(咸興府)이고, 진번은 요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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