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

대동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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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1212년(서기전 1122)에 지나(支那) 사람인 기자(箕子)가 무리 5천 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데, 기자의 성(姓)은 자(子)이고, 이름은 서여(胥餘)였다. 그는 상(商)나라 왕 주(紂)의 숙부(叔父)였는데, 주왕이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다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당하자 우리나라로 피하여 온 것이다.

나라 이름을 그대로 이어서 조선(朝鮮)이라고 하고, 8개 조목의 가르침을 반포하였으며, 정전제(井田制)를 정하고, 왕수긍(王受兢)을 사사(士師)로 임명하였는데, 왕수긍은 덕행이 있는 사람이었던 까닭에 정치가 정연해지고 풍속이 순박하고 아름다워졌다. 왕은 재위한 지 40년 만에 돌아가셨는데[崩], 나이가 93세였다. 시호(諡號)를 올려 태조(太祖) 문성왕(文聖王)이라고 하였다.

장혜왕(莊惠王) 송(松)은 종묘(宗廟)를 세웠으며, 공정왕(恭貞王) 백(伯)은 관제를 고치고 공복(公服)을 정하였다. 또 문무왕(文武王) 춘(椿)은 율(律)⋅도(度)⋅양(量)⋅형(衡)을 정하고1), 음력 정월[寅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며, 시위군(侍衛軍) 7천여 명을 두었다. 흥평왕(興平王) 착(捉)은 전(錢)을 주조하였고, 철위왕(哲威王) 조(調)는 말을 많이 길렀다.

선혜왕(宣惠王) 삭(索)은 직접 농사를 권장하고, 양현원(養賢院)을 설치한 후 백성 중에서 총명하고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육예(六藝)2)를 익히게 하였으며, 직언경(直言磬)을 매달아 억울함을 고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훤양왕(諠讓王) 사(師)는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을 고단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다. 문혜왕(文惠王) 염(炎)은 윤환법(輪環法)을 제정하여 궁핍한 백성을 구제하고, 오륜(五倫)3)의 도(道)를 가르쳤다.

성덕왕(盛德王) 월(越)은 삿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淫祀]를 금지하였고, 문열왕(文烈王) 우(優)는 초야에 묻혀 지내던 처사(處士) 감가찰(甘加察)을 극진히 대접하여 배와 노를 만들었다. 정경왕(貞敬王) 궐(闕)은 해산물과 소금, 구리와 쇠 등으로 지나(支那)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쌀을 사들여 빈궁한 백성을 구제하였다. 낙성왕(樂成王) 회(懷)는 군현(郡縣)을 순행하면서 훌륭한 관리들의 관직을 올려 주거나 무능한 관리를 내쫓고, 백성에게 선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은 징계하였으며, 빈곤한 이를 구휼하고 요사스러운 무당 영운(鈴雲)을 저잣거리에서 참수하여 내다 버렸다[棄市].

효종왕(孝宗王) 존(存)은 제양원(濟養院)을 설치하여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鰥寡孤獨]들을 구제하고, 뇌물을 받은 죄를 다스리는 법[犯贓律]을 제정하여 공용 재물 100만이나 백성의 재물 150만을 받은 자를 저잣거리에서 참수하였다. 박사관(博士館)을 설치한 후 고위 관리 중에서 재주와 덕이 모두 뛰어난 자를 관리로 임명하여 군사와 국정에 관한 큰일을 의결하게 하였다. 또 선우익(鮮于益)을 제나라에 보내어 환공(桓公) 강소백(姜小白)의 정치를 보고 배우게 하였으며, 제나라에서 공손각(公孫恪)을 보내 우리 조정에 들어와 참렬[入朝]하게 하자 그를 예우하여 접대하였고, 선비족(鮮卑族)【서백리(西伯里)】의 추장 길리도두(吉利都頭)가 조정에 들어오자 물품을 내려주었다. 천로왕(天老王) 효(孝)는 방사(方士) 백일청(伯一淸)에게 현혹되어 구선대(求仙臺)를 성천(成川)의 흘골산(紇骨山)에 건립하였는데, 그 높이가 500장(丈)이고 화려한 무늬가 있는 돌로 쌓아 올렸다. 또 사신을 보내어 제나라의 환공 강소백의 장례에 조문하였다.

수도왕(修道王) 양(襄)은 백일청을 국태사(國太師)로 임명하고, 왕의 잘못에 대해 바르게 간언하는 신하[諫臣] 염서적(冉西赤)을 전성(氈城)【지금의 온성(穩城)】으로 유배 보냈으며, 패강(浿江)【지금의 대동강(大同江)】에 신산(神山)을 쌓은 후 방사 노용(盧龍)을 울릉도(鬱陵島)로 보내 신선(神仙)을 찾아오게 하였다. 또 상주국(上柱國) 서문장수(西門長壽)를 죽였는데, 이는 서문장수가 백일청을 주살하려고 하다가 일이 누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휘양왕(徽襄王) 하(遐)가 백일청과 노용을 주살하자 백성이 서로 바라보며 축하하였다. 가옥과 시장세를 징수하였다. 봉일왕(奉日王) 참(參)의 시대에는 공손강(公孫康)이 왕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노려 왕의 숙부인 정(靜)을 죽인 후 왕을 별궁(別宮)에 유폐하였으니, 왕이 분통해 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하대부(下大夫) 남궁제성(南宮齊成)이 덕창왕(德昌王) 근(勤)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손강을 주살하였으며, 현명하고 어진 이들을 관직에 나아가게 하고 간사한 소인들을 물러나게 하니, 조정 안팎이 그의 덕을 찬양하였다. 수성왕(壽聖王)4) 삭(朔)의 시대에는 하이도(蝦夷島)【지금의 일본(日本) 홋카이도[北海島]】 추장이 와서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존현관(尊賢館)을 설치하였고, 또 어진 선비[賢士]인 웅국진(熊國珍)을 초빙하여 태사(太師)로 임명하였다. 영걸왕(英傑王) 여(藜)는 연삭(連朔)의 수령【지금의 태천(泰川)】 황이장(媓彛長)을 뇌물을 탐낸 죄로 팽형(烹刑)을 내려 죽였으며, 북쪽의 오랑캐[北胡]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왕이 정예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직접 정벌에 나서 머리를 벤 것이 1천여 명이었으며, 또 개척한 땅이 1천여 리였다. 일성왕(逸聖王) 강(岡)은 향헌장(鄕憲長)을 주(州)⋅군(郡)에 설치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농업과 상업에 대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제세왕(濟世王) 혼(混)은 제나라 및 노나라와 몰래 장사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정국왕(靖國王) 벽(璧)은 진언관(進言館)을 설치하여 왕에게 올바른 말을 간언해 올리도록 하였다.

도국왕(導國王) 징(澄)의 시대에는 우화충(宇和沖)이 태안(太安)【지금의 자산(慈山)】에서 봉기하여 북쪽 지방의 36개 군을 함락하고 수도[京師]로 진격하여 핍박하였다. 이에 왕이 혈구(穴口)【지금의 강화도(江華島)】로 피신하여 들어갔다가 2년 후에 수도를 다시 찾았다. 혁성왕(赫聖王) 척(隲)의 시대에는 북쪽 오랑캐의 추장이 와서 조공(朝貢)을 바치고 연(燕)나라가 사신을 보내 예물을 가지고 방문하였으며, 감찰관(監察官)을 주군(州郡)에 보내어 관리와 백성들의 선행과 악행을 살피게 하였다. 화라왕(和羅王) 습(謵)의 시대에는 연나라 사람이 만번한(滿番汗)【지금의 지나(支那) 성경성(盛京省)】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수장(守將) 묘춘장(苗春長)이 맞서 싸워서 크게 격파하였다.

설문왕(說文王) 하(賀)의 시대에는 박문관(博文館)을 설치하여 어진 선비 300명을 길렀다. 또 연나라 장군 진개(秦介)가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지역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상군대부(上軍大夫) 위문언(衛文言)이 병사 3만 명을 매복하여 두었다가 오도하(五道河)【지금의 요동(遼東) 양산성(陽山城) 북쪽】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남은 적군 세력을 연운도(連雲島)【지금의 요하구(遼河口) 지역】까지 추격하여 가서 크게 격파하고 진개를 활로 쏘아 죽였다.

경순왕(慶順王) 화(華)의 시대에는 북쪽 오랑캐의 추장이 와서 좋은 말 200필(匹)을 바치면서 연나라를 정벌해 달라고 요청하자 하군대부(下軍大夫) 신불사(申不死)로 하여금 보병 1만 명과 오랑캐 측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가서 연나라의 상곡성(上谷城)을 공격하게 하여 함락하였다. 가덕왕(嘉德王) 후(詡)는 연나라 왕 쾌(噲)가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한다는 말을 듣고는 가서 정벌하려고 하였다가 곧 대부 예(禮)의 간언에 따라 중지하였다. 삼로왕(三老王) 욱(煜)의 시대에는 상주국 왕림(王霖)이 주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서로 묻고 답하기가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으며, 또 북쪽 오랑캐의 추장이 악공(樂工)을 바쳤다. 현문왕(顯文王) 석(釋)은 현명하고 어진 선비 200명을 선발하였고, 왕이 교외에 나가 직접 땅을 갈았으며, 단군묘(檀君廟)에 제사를 지냈다. 장평왕(章平王) 윤(潤)은 북쪽 오랑캐들이 우리 조정에 입조하러 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직접 정벌하러 갔다가 패배하였다.

종통왕(宗統王) 부(否)는 법률에 깊이 통달한 자를 기용하여 도적을 잡아들였다. 애왕(哀王) 준(準)의 시대에는 한(漢)나라의 패공(沛公)5)이 원군(援軍)을 요청하자 병사 1만 명을 보내 한나라를 도와 초(楚)나라 군대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하였고6), 연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을 박사(博士)로 임명하여 서쪽 변방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단기 2140년(서기전 194)에 위만이 반역하여 수도를 습격하자, 왕은 금마군(金馬郡)【지금의 익산(益山)】으로 도망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수군을 직접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진격하여 가서 포위하였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돌아가셨다[崩]. 이때까지 거쳐 온 왕대가 모두 41대이며, 햇수로는 929년이다.

1)율은 소리, 도는 길이, 양은 부피, 형은 무게를 의미하는 것으로 율⋅도⋅양⋅형을 정하였다는 것은 측정 단위를 통일하였음을 의미한다.
2)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6종류를 가리킨다. 예는 예의에 맞는 몸가짐,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타기, 서는 서예(書藝), 수는 수학으로서 중국 주나라 때의 교육 과목이다.
3)유교에서 말하는 윤리상의 5가지 덕목으로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4)원문에는 가성왕(嘉聖王)으로 되어 있으나, 수성왕(壽聖王)으로 바로잡는다.
5)한나라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불리던 칭호이다.
6)해하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 부근으로 진(秦)나라 말기에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項羽)가 마지막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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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千二百十二年에 支那人ㅣ 箕子가 從者ㅣ 五千人을 率고 我國에 入據니 箕子의 姓은 子요 名은 胥餘라 商王 紂의 叔父니 紂가 無道야 周 武王의 滅 바 되거날 我國에 避來홈이러라

國號을 朝鮮이라 仍稱고 八條敎을 頒고 井田制를 定고 王受兢으로 士師을 拜니 受兢은 德行이 有 人이라 政治가 整然고 風俗이 純美더라 王이 在位지 四十年에 崩니 壽가 九十三이오 諡를 太祖 文聖王이라 더라

莊惠王 松은 宗廟을 立고 恭貞王 伯은 官制 改고 公服을 定며 文武王 椿은 律度量衡을 定고 寅月로 歲首을 作고 侍衛軍 七千餘 人을 置고 興平王 捉은 錢을 鑄고 哲威王 調난 馬 大畜고

宣惠王 索은 親히 農務을 勸고 養賢院을 置고 民間 聰俊을 擇야 六藝를 習케 고 直言磬을 懸야 冤枉을 伸케 고 諠讓王 師 土木을 大興야 民을 困苦케 고 文惠王 炎은 輪環法을 立야 窮民을 救濟고 五倫의 道를 敎고

盛德王 越은 淫祀를 禁고 文烈王 優 處士 甘加察을 賓禮로 待고 舟楫을 造고 貞敬王 闕은 魚鹽銅鐵로 支那 齊魯의 米을 貿야 貧民을 濟고 樂成王 懷 郡縣의 巡幸야 官吏을 黜陟고 人民을 勸懲며 貧困을 救恤고 妖巫 鈴雲을 棄市고

孝宗王 存은 濟養院을 置야 鰥寡孤獨을 救고 犯贓律을 立야 公貨 百萬이나 民財 一百五十萬을 取 者 棄市고 博士館을 置고 公卿 中 才德兼優 者로 館職의 充야 軍國ㅣ 大事을 議決고 鮮于益을 齊國에 遣야 桓公 姜小白의 政治을 觀고 齊國이 公孫恪을 遣야 入朝거날 禮待고 鮮卑【西伯里】의 酋長 吉利都頭ㅣ 入朝거날 賞賜고 天老王 孝난 方士 伯一淸의게 惑야 求仙臺을 成川 紇骨山에 建니 高가 五百丈이요 華紋石으로 築고 使를 遣야 齊桓公 小白의 喪을 弔고

修道王 襄은 伯一淸으로 國太師를 삼고 諫臣 冉西赤을 氈城【今 穩城】에 流고 浿江【今 大同江】에 神山을 築고 方士 盧龍를 鬱陵島에 遣야 神仙을 求고 上柱國 西門長壽를 殺니 此난 長壽가 一淸을 謀誅다가 事泄 故요 徽襄王 遐난 伯一淸과 盧龍을 誅니 百姓이 相賀고 家屋과 市場稅를 懲收고 奉日王 參ㅣ 時난 公孫康이 王의 年幼을 乘야 王의 叔父 靜을 殺고 其後에 王을 別宮의 幽니 王이 憂憤여 死거날 下大夫 南宮齊成이 昌德王 勤을 迎立고 康을 誅고 賢良을 進고 奸細을 退니 朝野가 頌德고 嘉聖王 朔ㅣ 時난 蝦夷島【今 日本 北海島】 酋長이 入貢고 尊賢館을 置고 賢士 熊國珍을 徵야 太師를 삼고 英傑王 藜난 連朔守【今 泰川】 媓彛長을 貪賂 罪로 烹殺고 北胡가 入寇거날 王이 精兵 三千을 率고 親征야 斬首기 千餘에 拓地가 千餘 里오 逸聖王 岡은 鄕憲長을 州郡에 置고 孝悌와 農商을 敎고 濟世王 混은 齊魯의 潛商을 禁고 靖國王 璧은 進言館을 置야 規諫을 進케 고

導國王 澄 時난 宇和沖이 太安【今 慈山】에셔 起야 北方 三十六郡을 陷고 京師을 進逼니 王이 穴口【今 江華】에 避入얏다가 二年 後에 京城을 收復고 赫聖王 隲 時 北胡 酋長이 入貢고 燕國이 遣使ㅣ 來聘고 監察官을 州郡에 遣야 吏民의 善惡을 察고 和羅王 謵ㅣ 時 燕人이 滿番汗【今 支那 盛京省】에 入寇거날 守將 苗春長이 迎擊大破고

說文王 賀 時 博文館을 置고 賢士 三百人을 養고 燕將 秦介가 二萬騎를 率고 遼西에 入寇거날 上軍大夫 衛文言이 三萬兵을 埋伏얏다가 五道河【今 遼東 陽山城 北】에셔 大破고  連雲島【今 遼河 口】에 追擊大破고 秦介를 射殺고

慶順王 華 時 北胡 酋長이 良馬 二百匹을 來獻고 伐燕기를 請거 下軍大夫 申不死로 야곰 步兵 一萬과 胡騎 一千을 率고 燕의 上谷城을 攻拔고 嘉德王 詡난 燕王 噲의 無道홈을 聞고 往伐코자 다가 大夫 禮의 諫을 從야 停止고 三老王 煜 時 上柱國 王霖이 周國의 如야 問答이 如流고 北胡 酋長이 樂工을 獻고 顯文王 釋은 賢良士 二百人을 選고 王이 郊에 親耕고 檀君廟에 祭고 章平王 潤은 北胡의 不朝홈을 怒야 親征다가 敗績고

宗統王 否 法律이 深刻 人을 用야 盜賊을 捕고 哀王 準 時 漢沛公이 救援을 請거날 兵ㅣ 萬人으로 往助야 楚軍을 垓下의셔 破고 燕人 衛滿으로 博士을 拜야 西鄙을 守케 얏더니

二千一百四十年에 滿이 叛야 京師을 襲니 王이 金馬郡【今 益山】에 出奔야 國號을 改야 曰 馬韓이라 고 故疆을 再復코자 야 水師를 親率고 平壤을 進圍다가 流矢를 中야 崩니 歷世가 四十一이오 歷年이 九百二十九年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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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