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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과 부서(部署)

게이죠 원년 9월에 강화의 논의를 파기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다시 정벌에 나서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듬해 2월 21일에 도선군(渡鮮軍)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1. 선진(先陣)·2진(二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7명의 장수로 하고, 가토와 고니시는 격일(隔日)로 교대하여 근무한다.

 1. 3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8명의 장수.

 1. 4진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重) 【나오시게의 아들】

 1. 5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 6진 쵸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7명의 장수.

 1. 7진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이코마카 주마사(生駒一正),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 8진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 부산성(釜山城), 【수장(守將)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가덕성(加德城), 【수장 다카하시 나오츠구(高橋直次)】 죽도성(竹島城), 【수장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서생포성(西生浦城) 【수장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전체 군대 약 14만 1500명

 1.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가 수군(水軍)을 감독하고, 필요에 따라 사국(四國)의 병력이 그를 지원할 것.

 1. 우선 전라도를 평정하고 그로부터 충청, 경기 등으로 나아갈 것.

 1. 만약 명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조선의 수도에 접근하는 데 5, 6일 정도의 거리에 도착하면, 신속히 그것을 보고할 것. 【『아사노가 문서(淺野家文書)』·『정벌기(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

육군(陸軍)의 경과

다시 조선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가토 기요마사는 다른 군(軍)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갔으며, 【게이죠 2년 정월 14일, 조선 선조 30년 정월 15일】 죽도(竹島) 【경상남도】 의 옛 보루를 복구하고 부산의 수병(戌兵)을 합쳐 기장(機張)에 진을 쳤다. 이어서 양산(梁山)을 함락시키고 서생포(西生浦) 부근에 방(榜)을 걸어 백성들에게 타일러 쓸데없이 소요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별도로 부산 밖 바다에서 진격하여 두모포(豆毛浦)로 들어갔으며, 【정월 15일】 2월 초하루에 부산에 있는 원래의 진영을 수리하여 오랫 동안 머물 계획을 세웠지만, 3월 중순에 이르러 제3군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잇따라 바다를 건너오자, 다섯 갈래로 나누어 조선에 들어가 동래, 기장, 울산 등을 점거하고 웅천, 김해, 진주, 사천, 곤양 등의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렇지만 결코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폭행을 하지는 않았으며 힘써 인민의 안심을 도모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조선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를 총독(總督)으로 삼고, 첨도어사(僉都御史)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삼고, 전 도독동지(都督同知) 마귀(麻貴)를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아, 군대를 출발시켜 조선을 구하러 갔다. 이리하여 양호와 마귀는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는데 양호는 평양에 주둔하였고 마귀는 경성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역할을 분담하였다.

7월에 일본군은 지난번 전쟁[임진란]을 거울삼아 육군과 힘을 합쳐, 우선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고 한산도(閑山島)를 점령하였다. 이에 앞서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장수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격을 재촉하였으므로 이때 일본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5만여 명은 경상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운봉(雲峰) 【전라북도】 을 접수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였다. 다른 한 부대는 모리 히데모토를 대장으로 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여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약 5만 명은 경주(慶州)를 출발하여 대구를 거쳐 전주(全州)로 향하였다. 나머지 한 부대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장수 야마구치 마사히로(山口正弘) 등 8천여 명을 이끌고 밀양과 현풍을 거쳐 충청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8월에 우키타 씨의 군대가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하였다. 【12일】 남원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요동(遼東)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 등과 지키고 있었지만, 마침내 15일 【조선력으로는 16일】에 성은 함락되어 이복남 등은 전사하고 양원은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명나라의 유격(遊擊)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남원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우키타 씨의 군대는 곧바로 전주를 함락시켰고, 【19일, 조선 20일】 모리 히데모토의 군대도 역시 황석산성(黃石山城) 【경상남도】 을 함락시키고, 안음(安陰) 【경상남도, 지금의 안의(安義)】 을 접수하고 와서 만났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진격하여 충청도를 평정하고, 히데모토는 전주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전의(全義) 【충청남도】 에 도착하였으며, 【9월 7일】 다른 부대인 가토 기요마사는 진천(鎭川) 【충청북도】 에, 구로다 나가마사는 직산(稷山) 【충청남도】 에 도달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왕성(王城)을 지켰으며 한강의 험준함에 의거하였는데, 경리 양호는 평양(平壤)에서 와서 부총병 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직산을 지키게 하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소사평(素沙坪)에서 싸웠다. 이때 히데요시는 군대를 퇴각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또한 날씨도 점차 추워졌으므로, 10월에 일본군은 후퇴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집결하였다. 기요마사는 울산(蔚山)에, 나가마사는 양산(梁山)에, 유키나가는 순천(順川)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는데, 시작과 끝이 7, 8십 리가 되는, 모두 16개의 진영이 해안을 따라 꾸려졌다.

12월에 명나라 장수 양호와 마귀는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였고,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권율 등은 이들을 따라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포위하였다. 당시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있었는데, 변고를 듣고 일어나 쾌속정을 타고 밤에 성 안으로 들어갔다. 도산(島山)은 포위된 지 12일이 되자, 【게이죠(慶長) 2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정월 4일까지】 양식이 부족하여 매우 곤란하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모리 히데모토 이하 일본군의 여러 장수들은 도산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명나라 군대는 패하였으며 마침내 포위를 풀고 경주로 도주하였다.

7월 【게이죠 3년, 조선 선조 31년】 에, 양호는 파직되고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경리(經理)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 군대는 삼협(三協)의 병력을 네 방면으로 나누어,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를 담당하고,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를 담당하며, 유정(劉綎)은 양로(兩路)를 담당하고, 진린(陳璘)은 수로(水路)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8월에 유정은 순천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먼저 거짓으로 유키나가와 화의를 약속하고, 그를 유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9월 19일에 순천을 포위하고, 진린은 해상(海上)으로부터 와서 힘을 합쳤지만 결국 당해 내지 못하였다. 23일에 마귀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울산을 공격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로(中路)의 장수 동일원은 유격 모국기(茅國器)와 사천을 공격하고, 【9월 7일】 이어서 망진(望津), 영춘(永春), 곤양(昆陽) 등의 진지를 함락시켰지만, 사천읍 이외의 새로운 진지에 이르러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크게 패하여, 【10월 1일】 진주로 돌아갔다. 【『기요마사 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아사노가 문서(淺野家文書)』·『구로다가기(黑田家記)』·『조선물어(朝鮮物語)』·『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명사(明史)』·『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징비록(懲毖錄)』·『사쓰마번구기(薩藩舊記)』】

해군(海軍)의 경과

게이죠(慶長) 2년 2월 21일에 히데요시는 도선군(渡鮮軍)의 역할 분담을 정하자,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명하여 해군을 통솔하게 하고, 사국(四國)의 병력으로 하여금 형편대로 그를 돕도록 하였다. 4월에 야스하루, 요시아키 등이 조선에 진입하자 적의 해군은 그들을 중도에 요격하려 하였지만, 때마침 태풍이 불고 파도가 심해, 조선의 수군은 거제로 물러나자, 야스하루 등은 다행히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은 물러나고 전라수사(全羅水使) 원균(元均)이 그를 대신하였다. 【2월】 원균은 한산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의 약속을 모두 바꾸고 형벌이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떠나고 군대의 사정은 동요하였다. 7월 15일 원균이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절영도(絶影島) 부근에 도달한 때는 이미 해질 무렵이었는데 군사들은 한산도를 출발하면서부터 하루 종일 노를 저어, 모두 피로에 지쳐 일본 군함이 바다에 출몰하는 것을 보면서도 운항할 수 없었다. 또 풍랑이 갑자기 일어 전함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원균은 남은 함선들을 수습하여 가덕도(加德島)로 후퇴하였다. 그날 밤, 일본 해군의 장수인 토도 타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 등은 진격하여 조선 함선의 정박지를 습격하였다. 조선군은 16일 새벽에 또 일본 군대의 습격을 받아 패배하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는 물에 빠져 죽고 원균도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다시 등용되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고, 9월에 일본 해군과 진도(珍島) 【전라남도】 의 벽파정(碧波亭)에서 싸워 일본 해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전함 30여 척을 파괴하였다. 이듬해 6월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은 남하하여 해군을 통솔하였는데, 8월에 이순신은 일본 해군과 고금도(古今島) 【전라남도의 남해에 있는 완도(莞島)의 동쪽에 있다.】 부근에서 싸워 역시 그들을 격파하고, 적군의 머리 백여 개를 획득하였지만, 진린은 그것의 대부분을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돌렸다.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와키사카가기(脇阪家記)』·『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선조실록(宣祖實錄)』·『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징비록(懲毖錄)』·『조야첨재(朝野僉載)』】

히데요시(秀吉)의 사망과 일본군의 철수

게이죠(慶長) 3년 【조선 선조 31년】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다. 유명(遺命)에 따라 죽음을 비밀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는 유명을 받들어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치쿠젠(筑前)의 하카다(博多)에 보내 군대를 귀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토쿠나가 나가마사(德永壽昌), 미야기 토요모리(宮木豊盛) 두 사람을 조선에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는 사천에서 대패한 후에는 일본군을 크게 두려워하여, 10월 13일에 모국기(茅國器)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허락을 받아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고, 그의 동생인 모국과(茅國科)를 보내 인질로 삼게 하였다. 유정(劉綎)도 역시 유키나가(行長)와 화의를 논의하였으며, 유천작(劉天爵)을 인질로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서로 약속하고 11월 10일을 군대 철수의 시한으로 삼았는데, 15일 【11월】 에 요시히로는 사천을 떠났으며, 17일에 기요마사는 울산을 떠났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여러 장수들도 역시 같은 날 군영을 철수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히데요시가 이미 세상을 떠나 일본군이 곧 조선을 떠나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총병(總兵) 등자룡(鄧子龍) 및 조선 통제사 이순신을 보내 수군 천여 명을 통솔하여 그들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요시히로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17일에 요시히로는 배를 순천 연안에 정박시켰는데, 18일 새벽에 적의 선박과 노량(露梁) 【경상남도】 에서 싸워 많은 병사들을 잃고, 점차 군대를 철수하여 거제(巨濟)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명나라 총병 등자룡과 함께 여러 차례 일본의 해군을 괴롭힌 조선 통제사 이순신도 역시 유탄에 맞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요시히로는 12월 10일에 하카다에 나타났으며 유키나가도 역시 돌아왔는데, 요시히로는 예전에 사천 대첩에서 명나라 사람들을 항복시켰고, 이 전투에서도 역시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 수군과 격렬히 싸워, 일본 군대가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이에야스는 토시이에(利家)와 상의하여 그 공을 높이 평가하고 보도(寶刀) 및 봉읍(封邑) 4만 석(石)을 요시히로에게 추가로 하사하였다. 【『히데요시보(秀吉譜)』·『기요마사기(淸正記)』·『나베시마 나오시게보(鍋島直茂譜)』·『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사쯔마번구기(薩藩舊記)』·『정한위략(征韓偉略)』·『명사(明史)』·『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징비록(懲毖錄)』·『이충무공전서부록(李忠武公全書附錄)』】

명나라 군대의 철수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곧바로 군대를 철수하였으므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명나라 군대도 역시 곧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선조 32년 【일본 게이죠(慶長) 4년, 명나라 만력(萬曆) 27년】 정월에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 진린(陳璘), 마귀(麻貴), 동일원(董一元) 등은 모두 군영을 철거하고 경성을 향하였으며, 형개(邢玠)는 네 노선[路]의 병력을 통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갔다. 만세덕(萬世德), 이승훈(李承勳), 【都督同知】 두잠(杜潛) 【산동안찰부사(山東按擦副使)】 등은 아직 경성에 남아 뒷수습을 잘 하려고 하였지만 이듬해 9월에 역시 돌아갔다. 이리하여 명나라 군대는 모두 조선에서 철수를 완료하였다.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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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再役と部署

慶長元年九月、講和の議破るるや、秀吉は直ちに再征の令を下し翌年二月廿一日渡鮮軍の部署を左の如く定めたり。

 一、先陣·二陣 加藤淸正·小西行長等七將、先陣は加藤·小西隔日交代に勤むべし。

 一、三陣 黑田長政·毛利吉成等八將。

 一、四陣 鍋島直茂·同勝重。【直茂の子】

 一、五陣 島津義弘。

 一、六陣 長曾我部元親·藤堂高虎·加藤嘉明等七將。

 一、七陣 蜂須賀家政·生駒一正·脇坂安治。

 一、八陣 毛利秀元·宇喜多秀家。

 一、釜山城 【守將小早川秀秋】 加德城 【 同高橋直次】 竹島城 【同毛利秀包】 西生浦城 【同淺野幸長】

  惣軍約十四萬千五百人

 一、水軍は藤堂高虎·脇坂安治·加藤嘉明之を監し、必要に應じて四國の兵之を援くべし。

 一、先づ全羅道を定め、夫れより忠淸·京畿其の他へ及ばすべし。

 一、明國若し大軍を發し朝鮮の都を距る五六日程に至らば速に之を報ずべし。 【淺野家文書征伐記·征韓偉略】

ロ、陸軍の經過

再征の令下るや、加藤淸正は諸軍に先ちて朝鮮に入り、 【慶長二年正月十四日、朝鮮宣祖三十年正月十五日】 竹島 【慶尙南道】 の舊壘を復し、釜山の戍兵を合して機張に屯せしが、次いで梁山を陷れ、西生浦に抵りて榜を揭げ、民に諭して妄りに騷擾すること莫らしめたり。小西行長別に釜山外洋より進んで豆毛浦に入り、 【正月十五日】 二月朔、釜山の原營を修めて以て據久の計を爲せしが、三月中旬に至り、第三軍以下の諸將相繼いで海を渡り、五路に分れて朝鮮に入り、東萊·機張·蔚山等に占據して熊川·金海·晉川·泗川·昆陽等の間を往來す。然れども敢て人を殺し、財を掠むる等の暴行を爲さず、務めて人民の安堵を計れり。

時に明國は朝鮮の急を聞き、兵部尙書邢玠を總督となし、僉都御史楊鎬を經理となし、前都督司知麻貴を總兵官となし、兵を發して之を救はしむ。是に於て楊鎬·麻貴諸軍を率ゐて江を渡りしが、楊鎬は平壤に駐まり麻貴は京城に至りて諸將を部署せり。

七月、日本海軍は前役に鑑みて陸軍と力を協せ先づ朝鮮の水師を破りて閑山島を取る。是より先、秀吉は書を在韓諸將に與へて其の進軍を促せしかば、是に至りて日軍は兵を分ちて三となし、一隊は宇喜多秀家を大將とし、小西行長を先鋒として島津義弘·蜂須賀家政等五萬餘人、慶尙道の南邊に沿ひ、雲峰 【全羅北道】 を略して南原に向ひ、一隊は毛利秀元を大將とし、加藤淸正を先鋒として黑田長政·淺野幸長等約五萬、慶州を發し、大丘を經て全州に向ひ、一隊は小早川秀秋の將山口正弘等八千餘人を率ゐて、密陽·玄風を經、進んで忠淸道に入らんとせり。

八月、宇喜多氏の軍進んで南原を圍む。 【十二日】 南原には明の副總兵楊元、遼東の軍を率ゐて全羅兵使李福男等と據守せしが、十五日 【朝鮮十六日】 城遂に陷りて李福男等戰死し、楊元は僅かに身を以て免れたり。明の遊擊陳愚衷は、全州を守りしが、南原陷り、日本軍將に至らんとするを聞くや、大いに懼れて北走せしかば、宇喜多氏の軍は直ちに全州を取り、 【十九日、朝鮮二十日】 毛利秀元の軍亦黃石山城 【慶尙南道】 を陷れ、安陰 【慶尙南道今の安義】 を略して來り會せり。是に於て日本軍進んで忠淸道を徇へ、秀元は全州より公州を經て全義 【忠淸南道】 に至り 【九月七日】 其の一隊加藤淸正は鎭川 【忠淸北道】 に、黑田長政は稷山 【忠淸南道】 に達す。是より先、明軍は退いて王城を守り、漢江の險に據りしが、經理楊鎬、平壤より來り、副總兵解生をして稷山を守らしめ、黑田長政の軍と素沙坪に戰へり。時に秀吉、退軍の令を發し、且天候漸く寒を加ふるを以て、十月、日本軍は退いて慶尙全羅の南邊に集り、淸正は蔚、山に、長政は梁山に、行長は順天に、嶋津義弘は泗川に屯し、首尾七八十里凡そ十六屯、海岸に沿ぅて營を爲せり。

十二月、明將楊鎬·麻貴、大軍を率ゐて南行し、朝鮮の都元帥權慄等是に從ぅて加藤淸正を蔚山の島山城に圍む。當時淸正は西生浦にありしが、警を聞いて起ち、走舸に乘じて夜城中に入る。島山、圍を受くること十二日、 【慶長二年十二月二十二日よリ翌年正月四日に至る】 糧食缺乏して頗る窮困したりしも屈せず。毛利秀元以下日本軍の諸將急を聞いて來り救ひしかば、明軍敗れ、遂に圍を解いて慶州に走れり。

七月 【慶長三年·朝鮮宣祖三十一年】 楊鎬罷められ、天津巡撫萬世德代つて經理となる。是より先、明軍は三協の兵十萬を四路に分ち、麻貴は東路を主り、董一元は中路を主り、劉綎は兩路を主り、陳璘は水路を主ることとなれり八月劉綎は順天を攻めんとせしが、先づ僞りて行長と和を約し、之を誘出して·擒にせんとせしも成らず九月十九日、順天を圍み、陳璘海上より來りて力を協せしも遂に克つこと能はず二十三日、麻貴、諸將を率ゐて蔚山を收めしも亦克つこと能はざりき。中路の將董一元は遊擊茅國器と泗川を攻め、 【九月七日】 連りに望津·永春·昆陽等の諸寨を陷れしが、泗川邑外の新·寨に至りて大いに島津義弘の爲に破られ、 【十月一日】 奔りて晉州に還れり。 【淸正高麗陣覺書·鍋島茂直譜考補·淺野家文書·黑田家記·朝鮮物語·朝鮮征伐記·征韓偉略·明史·兩朝平攘錄·懲毖錄薩·藩舊記】

ハ。海軍の經過

慶長二年二月二十一日、秀吉渡鮮軍の部署、を定むるや、藤堂高虎·脇坂安治·加藤嘉明等に命じて、海軍を督し、四國の兵をして便宜之を助けしむ。四月安治·嘉明等朝鮮に入り、敵の海軍之を中途に要繫せんとせしが、會會大風起りて波浪相激し、朝鮮の舟師は巨濟に退き、安治等は辛ぅじて釜山に著することを得たり。

是より先、統制使李舜臣却ばられて、全羅·水使元均之に代る。二月元均閑山島に至りて悉く舜臣の約束を變じ、刑罰度なかりしかば、衆皆心を離し、軍情動搖せり、七月十五日、元均舟師を率ゐて閑山島を發し、絶影島の附近、に至りしに、時旣に黃昏、軍士、閑山島を發してより終日櫓を搖かし、皆疲頓して日本軍船の海中に出沒するを望むも、運轉すること能はず。且、風浪俄に起りて戰船四散したりしかば、均は餘船を收めて加德島に退けり。其の夜、日本海軍の將、藤堂高虎·脇坂安治·加藤嘉明等進んで其の碇泊地を襲ひ、將士數百人を斬る。均退いて漆川島巨濟の西方にある小島に泊せしに、十六日黎明又日本軍の爲に襲はれて敗北し、全羅右水使李億祺は水に投じて死し、元均亦殺さる。是に於て李舜臣再び用ひられて統制使となり、九月日木海軍と珍島 【全羅南道の】 碧波亭に戰ぅて之を破り、其の三十餘隻を毁つ。翌年六月、明水師提督陳璘、南下して海軍を督し、八月、李舜臣は日本海軍と古今島 【全羅南道の南海中莞島の東方にあリ】 の附近に戰うて亦之を破り、首級百餘を得たりしが、陳璘其の大半を奪うて以て己の功となせり。 【高麗船戰記·脇阪家記·朝鮮征伐記·征韓偉略·鍋島直茂譜考補·李朝宣祖實錄·李忠武公全書·懲毖錄·朝野僉載】

ニ。秀吉の薨去と日本軍の引上げ

慶長三年 【朝鮮宣祖三十一年】 八月·十八日秀吉薨ず。遺命して喪を秘し、師を班さしむ。德川家康·前田利家、遺命を奉じて、淺野長政·石田三成を筑前博多に遣はして還師の事を督せしめ、德永壽昌·宮木豐盛の兩人を朝鮮に遣はして、命を諸將に傳へしむ。然るに明軍は泗川大敗の後は、大いに日本軍を畏れ、十月十三日茅國器は使を島津義弘の許に遺はして和を請ひ、其の弟茅國科を送りて質となし、劉綎亦行長と和を議し、劉天爵を以て質となせり。是に於て在鮮の諸將は相約し、十一月十日を以て班師の期と爲し、十五日 【十一月】 義弘は泗川を去り、十七日淸正は蔚山を去り、鍋島直茂·淺野幸長·黑田長政毛利吉成等の諸將亦同日を以て營を撤せり。明提督陳璘は諜して秀吉の旣に薨し、日本の將に去らんとするを知り、直ちに總兵鄧子龍及び朝鮮統制使李舜臣を遣はし、水軍千餘人を督して之を遮らしむ。小西行長順天に在り、聞いて援を義弘に乞ひしかば、十七日義弘は舟を順天の沿岸に泊せしが、十八日黎明敵の軍船と露梁 【慶尙南道】 に會戰して多く從士を失ひ、漸く軍を收めて巨濟に入ることを得たり。明總兵鄧子龍並に屢屢日本の海軍を苦めし朝鮮統制使李舜臣亦流丸に中りて此の役に戰死す。かくて義弘は十二月十日を以て博多に著し、行長亦次いで歸りしが、義弘は曩に泗川の大捷にて明人を畏れしめ、此の役亦·明·朝鮮の水軍と激戰し、共に日本軍をして師を全ぅして歸らしむるの大功ありしかば、後に家康は利家と議して其の功を賞し、寶刀及び封邑四萬石を義弘に加賜せり。 【秀吉譜·淸正記·鍋島直茂譜·朝鮮征伐記·薩藩舊記·征韓偉略·明史·兩朝平攘錄·懲毖錄·李忠武公全書附錄】

ホ。明軍の引上げ

秀吉の薨ずるや、日本は直ちに其の兵を撤したれば、戰役は從つて局を收め、明軍亦程なく朝鮮より撤退せり。宣祖三十二年 【日本慶長四年、明萬曆廿七年】 正月明將劉綎·陳璘·麻貴·董一元等皆營を撤して京城に向ひ、四月邢玠は四路の兵を領して西に還る。萬世德·李承勳· 【都督同知】 杜濳 【山東按擦副使】 等は尙ほ京城に駐つて善後の計を爲せしが、翌年九月亦還り去り、是に於て明軍は悉く朝鮮より撤退し了れり。 【春坡堂日月錄·朝野僉載】